'결혼초기' 검색결과 총 9,851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시장 골목에서 고립된 것은 ‘정권’ “그 해 여름에? 데모 많이 했지. 학생들이 막 도망 오면 많이 숨겨줬어. 그땐 다 그랬어.” 20년 전 서른일곱 살이던 강성애씨는 고종사촌 언니가 경영하는 떡집에서 일을 하다 경찰에 쫓겨 온 시위대들을 2층 식당으로 3층 가게로 피난시켰다. 강씨가 일하는 떡가게는 남대문시장에 나 있는 8개 골목 중 한 곳에 위치하고 있다. 급하게 골목으로 숨어든 시위대들이 우선 찾아들만한 곳이다. “학생들 올려 보내고 셔터를 바로 내렸어. 경찰이 쫓아와 셔터를 올리려고 하면 ‘최루탄 때문에 괴로워 죽겠는데 어디서 셔터를 올리느냐’고 막 야단 쳐서 보냈지.” 경찰이 무섭지도 않았다 한다. 강씨는 지금은 파출소장이 된 친동생을 포함 친척 중 네 명이 경찰이었다. 당시 경찰이던 고종사촌 오빠는 “나라에서 시키니까 할 수 없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경찰도 한마음이었던 셈이다. 그해 시장 어머니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강씨처럼 시위대들을 숨겨줬다. 그들은 서로서로 바깥 동태를 알려주며 충실한 정보원 역할을 했다. 전두환 정권은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잃었고, 시위대는 이들의 마음을 얻었다. 시장 골목 안에서 고립된 것은 정권이었다. 당시 대학 4학년이었던 김정수(44)씨는 “주황색 바가지에 보리차를 그득 담아 얼음을 동동 띄워 시위대에게 나눠주는 냉차 아주머니, 때론 야쿠르트를 비닐봉지에 5개 6개씩 담아 학생들의 손에 쥐어주던 아저씨, 팔던 손수건을 학생들의 손에 쥐어 주며 마스크 대용으로 쓸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던 아주머니 등등 나중에는 좁은 시장판에서 도망다니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군이 많아졌다”며 “6월 18일 이후엔 남대문에서 잡힐 걱정은 전혀 하지 않게 되었다”고 기억했다. “왜 숨겨 주었냐고? 잡히면 다 죽는다고 하더라.” 강씨는 그게 무슨 일이었는지 지금도 모르지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시 시위대는 “학살정권 고문정권 전두환을 타도하자” 등의 구호도 외쳤다. 박종철군이 경찰 고문으로 사망했고, 6월 시위 도중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던 때였다. 짧았던 여름은 가고, 20년이 흘렀다. 투표할 때마다 ‘당첨자를 맞추지 못하던’ 강씨는 97년과 2002년 연이어 자신이 찍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맞았다. 그러나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김대중씨는 서민을 위해 잘 할 거라고 생각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딸 아이들이 찍으라고 해서 투표했는데, 둘 다 실망했다”고 말한다. 지금은 박근혜 이명박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이 많이 한다고 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역시 생활이다. 강씨는 고종사촌 언니가 하던 떡가게를 물려받아 경영을 하고 있다. 시위대를 숨겨주던 이곳에서 열심히 일해 아이들을 모두 대학 졸업시켰고, 결혼도 시켰다. IMF는 시장에서 떡집을 하는 그에게도 타격을 주었다. 강씨는 “97년을 정점으로 장사가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강씨나 남대문시장에서 가게를 갖고 일하는 사람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문제는 남의 집에서 일하는 임노동자들이다.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 차이는 갈수록 벌어지는 것 같다”는 게 강씨의 느낌이다. 양극화는 강씨와 이웃 가게에 일하는 사람들의 삶에도 구체적으로 스며들고 있다. 물론 자신의 가게를 경영하는 상인들도 “갈수록 살기 어려운 것 같다”고 말한다. 20년 전에 비하면 말하는 자유는 많이 생긴 것 같은데, 살아가는 자유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낀다. 남대문시장(주) 관계자는 “장사가 잘 안되니까 상가관리비를 쉽게 내지 못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말했다. 강씨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가게 앞으로 다가오자 한 달음에 다가가 흥정을 한다. 상가에서 일본인과 중국인을 상대로 장사를 할 수 있게 흥정이나 셈 하는 방법을 적은 일본어 중국어 회화책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87년 여름 민주주의를 품었던 남대문시장 상인들은 그날도 오늘도 치열한 생존 경쟁을 치르고 있다. ▶ 관련기사 3, 13면 ▶ 특별취재팀 = 정연근 백만호 윤여운 김은광 원종태 방국진 기자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6-11
- SK증권 김우평 사장 ‘CEO 청소년 경제교실’ ‘회사가 뭐에요?’ , SK증권 김우평 사장 ‘CEO 청소년 경제교실’ 열어 SK증권(사장 김우평)이 8일(금) 장래 우리경제를 이끌어 갈 초·중등 학생을 대상으로 ‘CEO 청소년 경제교실’을 연다고 밝혔다. 이번 청소년 경제교실은 김우평 SK증권 사장이 여의도 본사에 직접 어린이들을 초청하여 아이들에게 올바른 경제 가치관을 심어주고자 계획된 것이다. SK증권의 ‘청소년 경제 교실’은 사회공헌활동의 일부 프로그램이며, 전국 각 지점 단위로 초등학생과 중학생을 대상으로 경제에 대한 기초지식과 경제관념을 심어줄 수 있는 소비, 저축, 신용 교육 중심으로 학습을 진행하고 있다. 또한 방학기간을 이용하여 ‘청소년 경제캠프’를 계획중에 있다. 대상은 저소득층 및 베트남 국제결혼 자녀, 이주노동자 자녀들로 경제교육을 받기 어려운 어린이를 선정하여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자 함이다. 김우평 사장은 “금융회사로서 자라나는 세대에게 올바른 경제관념을 만들어주는 것이 향후 회사나 사회를 위한 길”이라 말하고 “금융회사로서 사회에 공헌할 수 있는 다양한 경제 프로그램을 만들 것”이라고 밝혔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6-11
- 한국디지털대, 담양서 한국어 교육 수료식(사진 : 다문화) 여성결혼이민자들이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온라인을 통해 무료로 배우는 한국디지털대학교 ‘다문화가정 e-배움 캠페인’의 한국어 시범교육 수료식이 9일 전남 담양군 여성회관에서 열렸다. 한국디지털대는 지난 2월말부터 ‘다문화가정 e-배움 캠페인’의 시범교육 지역으로 선정된 전남 담양군(여성회관)과 경북 구미시(시립도서관)에서 여성결혼이민자를 대상으로 매주 1회 컴퓨터 정보화 교육을 실시했다. 또 4월부터는 한국어 초급과정을 온라인과 집합 교육을 통해 진행하고 있다. 여성결혼이민자를 대상으로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온라인(http://e-campaign.kdu.edu)으로 가르치는 교육은 이 캠페인이 처음이다. 한국디지털대 관계자는 “여성 결혼이민자들을 단지 한국어가 서툴다는 이유로 어린아이 취급을 하거나 한국에 적응하지 못하는 불행한 사람으로 보는 눈길이 오히려 이들의 정착을 어렵게 한다”며 “여성결혼이민자들도 인생의 꿈이 있고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은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다”고 말했다. 그는 또 “이번 교육은 여성결혼이민자들이 한국에서 행복하게 정착하고 미래의 꿈을 키울 수 있는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다문화가정 e-배움 캠페인’에는 한국디지털대 학생들이 자원봉사자로 참여해 눈길을 끌고 있다. 이 캠페인은 한국디지털대가 포스코의 후원과 전남·경북 도청의 행정지원으로 시범실시를 하고 있다. 8월에는 전남 및 경북 45개 시·군으로 확대 실시하고, 내년부터는 전국으로 확산시킬 예정이다. 또 앞으로 한국인 배우자를 대상으로 외국인 배우자의 모국어ㆍ문화 교육도 실시하고 지역사회로 진출할 수 있는 전문화 교육과 대학교육의 기회도 제공할 계획이다. ‘다문화가정 e-배움 캠페인’의 포털사이트에 접속하면 온라인 까페에서 다문화가정 구성원뿐 아니라 관심 있는 일반인 누구나 다양한 문화 교류를 할 수 있다. 사진설명 “ 지난 3월부터 전남 담양군에서 실시된 ‘다문화가정 e-배움 캠페인- 정보화 시범교육 수료식’에서 수강생들이 수료증을 받고 즐거워하고 있다.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6-11
- 시위대의 어머니, 남대문 시장 상인들 메인사진 : 기획팀-남대문1 보조사진 : 기획팀-남대문2. (모두 비니에 보냈음.) 이의종씨 사진은 ftp방에 있는데 그 중 하나 또는 둘..(편집에 맞게 보조사진으로 사용) 시장 골목에서 고립된 것은 ‘정권’ 경찰로부터 시위대 보호 … 냉차·요구르트·손수건 내주며 격려 20년 후 “말하는 자유 많아졌지만, 살아가는 자유 여전히 부족”(발문을 넣으면 빼도 됨) 발문 = 양극화는 남대문 시장 가게에 일하는 사람들의 삶에도 구체적으로 스며들고 있다. 그들은 20년 전에 비하면 말하는 자유는 많이 생긴 것 같은데, 살아가는 자유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낀다. “그 해 여름에? 데모 많이 했지. 학생들이 막 도망 오면 많이 숨겨줬어. 그땐 다 그랬어.” 20년 전 서른일곱 살이던 강성애씨는 고종사촌 언니가 경영하는 떡집에서 일을 하다 경찰에 쫓겨 온 시위대들을 2층 식당으로 3층 가게로 피난시켰다. 강씨가 일하는 떡가게는 남대문시장에 나 있는 8개 골목 중 한 곳에 있는데, 큰 길에서 골목으로 접어들어 20m 정도 위치에 있다. 급하게 골목으로 숨어든 시위대들이 우선 찾아들만한 위치다. “학생들 올려 보내고 셔터를 바로 내렸어. 경찰이 쫓아와 셔터를 올리려고 하면 ‘최루탄 때문에 괴로워 죽겠는데 어디서 셔터를 올리느냐’고 막 야단 쳐서 보냈지.” 경찰이 무섭지도 않았다 한다. 강씨는 지금은 파출소장이 된 친동생을 포함 친척 중 네 명이 경찰이었다. 당시 경찰이던 고종사촌 오빠는 “나라에서 시키니까 할 수 없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경찰도 한마음이었던 셈이다. 그해 시장 어머니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강씨처럼 시위대들을 숨겨줬다. 그들은 서로서로 바깥 동태를 서로 알려주며 충실한 정보원 역할을 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잃었고, 시위대는 이들의 마음을 얻었다. 시장 골목 안에서 고립된 것은 정권이었다. 당시 대학 4학년이었던 김정수(44)씨는 “주황색 바가지에 보리차를 그득 담아 얼음을 동동 띄워 시위대에게 나눠주는 냉차 아주머니, 때론 야쿠르트를 비닐봉지에 5개 6개씩 담아 학생들의 손에 쥐어주던 아저씨, 팔던 손수건을 학생들의 손에 쥐어 주며 마스크 대용으로 쓸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던 아주머니 등등 나중에는 좁은 시장판에서 도망다니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군이 많아졌다”며 “6월 18일 이후엔 남대문에서 잡힐 걱정은 전혀 하지 않게 되었다”고 기억했다. “왜 숨겨 주었냐고? 잡히면 다 죽는다고 하더라.” 강씨는 그게 무슨 일이었는지 지금도 모르지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시 시위대는 “학살정권 고문정권 전두환을 타도하자” 등의 구호도 외쳤다. 박종철군이 경찰 고문으로 사망했고, 6월 시위 도중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던 때였다. 짧았던 여름은 가고, 20년이 흘렀다. 투표할 때마다 ‘당첨자를 맞추지 못하던’ 강씨는 97년과 2002년 연이어 자신이 찍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맞았다. 그러나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김대중씨는 서민을 위해 잘 할 거라고 생각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딸 아이들이 찍으라고 해서 투표했는데, 둘 다 실망했다”고 말한다. 지금은 박근혜 이명박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이 많이 한다고 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역시 생활이다. 강씨는 고종사촌 언니가 하던 떡가게를 물려받아 경영을 하고 있다. 시위대를 숨겨주던 이곳에서 열심히 일해 아이들을 모두 대학 졸업시켰고, 결혼도 시켰다. IMF는 시장에서 떡집을 하는 그에게도 타격을 주었다. 강씨는 “97년을 정점으로 장사가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강씨나 남대문시장에서 가게를 갖고 일하는 사람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문제는 남의 집에서 일하는 임노동자들이다.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 차이는 갈수록 벌어지는 것 같다”는 게 강씨의 느낌이다. 양극화는 강씨와 이웃 가게에 일하는 사람들의 삶에도 구체적으로 스며들고 있다. 물론 자신의 가게를 경영하는 상인들도 “갈수록 살기 어려운 것 같다”고 말한다. 20년 전에 비하면 말하는 자유는 많이 생긴 것 같은데, 살아가는 자유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낀다. 남대문시장(주) 관계자는 “장사가 잘 안되니까 상가관리비를 쉽게 내지 못 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고 말했다. 강씨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가게 앞에 줄을 지어 한국의 떡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한 달음에 다가가 흥정을 한다. 상가에서 일본인과 중국인을 상대로 장사를 할 수 있게 흥정이나 셈 하는 방법을 적은 일본어 중국어 회화책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87년 여름 민주주의를 품었던 남대문시장 상인들은 그날도 오늘도 치열한 생존 경쟁을 치르고 있다. 정연근 기자 ygjung@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6-11
- ‘다문화가정’ 정착 위한 교육·상담 맡아 밀착형 종합서비스 시도 … 전문인력 확보·사후 점검은 풀어야 할 과제 결혼이민자 가족이 급증하면서 법과 제도만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각종 문제도 등장하고 있다. 오랜기간 이질적 문화에서 살아온 이들이 국제결혼을 통해 가정을 꾸리면서 언어장벽과 문화차이에 잇따라 부딪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들에게 국어·문화 교육 등을 지원할 ‘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의 역할이 대폭 강화되고 있다. ‘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는 국제결혼으로 한국에 온 외국인들과 이들 가족이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어려움을 해결하고 서로 다른 문화를 수용하는 ‘다문화가정’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종합서비스를 제공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정부는 올해 전국 37개 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를 운영해 다민족사회로 가기 위한 민관협력 거점으로 활용할 방침이다. 지난 2004년 한국남성과 결혼한 필리핀 출신 엘레나(가명·27)씨는 한동안 우울증을 앓았다. 한국에서의 가정 문화가 너무 낯설었기 때문이다. 10세 이상 연상인 남편은 출근하면서 현관에서 아내의 배웅을 받기를 원했다. 엘레나씨는 남편이 자신을 무시하기 때문에 권위주의적으로 행동한다고 생각했다. 시부모님은 노크 없이 방문을 수시로 열고 알아 듣기 어려운 한국어로 말을 시켰다. 시댁 식구들은 젊고 똑똑한 며느리가 귀여워 관심을 표현한 것이었지만 엘레나씨는 ‘외국인 며느리를 못 믿어 감시한다’고 느꼈다. 분위기가 냉랭해지면서 엘레나씨는 방문을 닫고 자주 울었다. 위기를 느낀 가족들은 해결 방법을 찾아 서울의 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의 문을 두드렸다. 전문 상담원과의 대화를 통해 엘레나씨는 가족들의 행동이 한국에서는 일상적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상담원은 시부모님에게도 특별한 교육을 진행했다. “한국 어른들이 한국 음식 좋아하듯 며느리는 필리핀 음식을 먹고 싶어한다”며 필리핀 요리를 배워볼 것을 권했다. 또 “아들 부부에 대한 관심이 사생활 침해가 될 수 있다”며 며느리에게 자유 시간을 더 많이 줄 것을 조언했다. 이후 엘레나씨는 가족들의 응원을 받으며 한국어 교육과정에 입학했고 웃음을 되찾았다. ◆정부·기업·지자체 교류 역할도 담당 = 우리 사회가 통합되는 과정의 ‘쌍방적 적응’을 위해 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쌍방적 적응’이란 결혼이민자 뿐만 아니라 한국정부와 한국인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다는 개념이다. 과거에는 외국인 며느리에게 한국문화를 빨리 배우도록 다그치는 등 일방적으로 한국사회에 동화되기를 강요하는 경향이 강했다. 하지만 국제결혼이 증가할수록 이 방식으로는 갈등을 해결하기 어려워졌고 외국인 배우자가 이혼을 선택하거나 한국을 떠나는 극단적 사태를 맞기도 했다.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가족단위 교육 중요성이 강조되면서 앞으로는 센터를 통해 국제결혼 부부는 물론 그 가족 구성원 전체에 대한 교육이 강화된다. 또 센터가 지방자치단체와 지역 시민단체, 기업 등과 결혼이민자들이 소통하는 창구로 활용된다. 서울의 동대문구 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는 결혼이민 여성들과 함께 지역 독거노인 대상 봉사활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런 활동은 지역 노인들이 외국여성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바꾸는데 효과를 거뒀다. 강원도 강릉문화원은 관동대학교와 협력해 도자기 만들기 행사를 결혼이민가족과 함께 진행했다. 이외에도 각 지역별 센터들이 △다문화 가정 선후배를 연결하는 ‘멘토 멘티’ △외국인 유학생의 자원봉사 참여유도 △민간기업의 후원사업 등의 거점을 맡고 있다 ◆희생정신·자원봉사보다 실질적 지원책 필요 = 하지만 센터의 긍정적 역할을 강화하기 위해 풀어야할 과제가 많다. 지역사회에서는 센터 지정 과정의 투명성을 높이고 사후관리 감독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최근 충남 아산시에서는 센터 지정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면서 단체별로 분란이 일고 음모론까지 제기된 바 있다. 또 서울 일부 시민단체에서는 결혼이민 여성에게 시장체험 기회를 준다는 명목으로 상품권을 지급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정부 지원 사업이 확대되면서 사업 예산을 확보하기 위한 과다한 경쟁과 준비없는 사업이 남발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센터 관계자들은 “희생정신과 자원봉사자에게 의존하는 방식을 벗어나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현재 대다수 센터는 인력부족에 시달리고 업무를 중복해 맡는 경우가 많다. 사회적 협력 네트워크가 약해 행사 하나를 준비하면서도 센터장들의 개인능력에 의존하는 사례도 대다수다. 최근 행사를 진행한 모 센터 관계자는 “행사 장소를 빌리려면 며칠동안 기관과 대학에 수십통 전화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여성부 관계자는 “현재 지방자치단체가 공모나 사전심사를 통해 센터를 지정하고 있다”며 “앞으로 여성부에서 센터의 실적을 점검하고 현장 방문을 통한 사후관리도 강화할 것”이라고 말했다. 특별취재팀 = 안찬수 김선일 전예현 기자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5-21
- 여성가족부, 결혼이민자 지원 확대 올초 전국 21개에서 37개소 선정 여성가족부는 외국인 주부와 가족들의 언어 장벽, 2세 교육, 취업 등을 지원하는 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를 지난 3월 전국에서 확대, 선정해 지원해오고 있다. 지난해 21개소였던 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를 올해 37개소(아산시는 유보상태)로 선정했으며, 각 지역 대학교 건강가정지원센터 6곳(아산시 호서대는 유보), 시.도 직영 9곳, 사회복지법인 5곳, 기타 법인 17곳 등이다. 지원센터로 선정된 곳에 대해 각 지방자치단체와 정부가 예산을 지원하고 있으며, 관내 결혼이민자 가족의 사회적응을 지원하는 통합지원시책을 추진하고 있다. 특히 지원센터는 한국어교실 운영을 지속적으로 확대하고 한국어교육기관 협의체 운영을 통해 언어소통 해결을 돕고 있으며, 가족문제 상담, 문화교육, 가족봉사단 등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대전시는 유관기관과 협의체를 구성해 통합지원체계를 마련한다는 방침으로 2010년까지 각 구별로 1개소의 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를 설치, 운영할 계획이다. 익산시 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원광대학교 건강가정지원센터)가 22일 오후2시부터 ‘2007년 전라북도 결혼이민자가족을 위한 어울림 한마당’을 개최하는 등 지역별 화합마당과 지원 프로그램을 갖고 운영하고 있다. 김선일 기자 sikim@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5-21
- 인터뷰 - 한국인으로 귀화한 결혼이민자 레이아씨 “한국과 북한도 구분 못했는데 귀화까지 했어요” “아가야, 냄비 좀 갖다 줘 ” 신혼 초 부엌에서 시어머니 뒤에 우두커니 서 있던 레이아(34)씨는 당황해 어쩔 줄을 몰랐다. 필리핀에서 온 레이아씨가 ‘냄비’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을 눈치 챈 시어머니는 냄비를 가리키며 웃었다. 7년 전 레이아씨가 갓 결혼해 경북 김천의 시댁에 살 던 때의 모습이다. 레이아씨는 9남매 중 여섯째다. 필리핀 쎄부에서 4년제 상업계 대학을 졸업하고 그곳에서 취업해 일했다. 해외로 나가기 위해 마닐라로 가 여권을 신청해 놓고 교회에 다니다 스물일곱 살에 한국인 남편을 만났다. 그는 “한국을 북한과 구분하지 못해 매우 무서운 나라로 생각했다”며 당시 한국에 대한 느낌을 말했다. 결혼 후 김천 시댁에서 1년 6개월을 살다가 남편 직장을 따라 경남 창원으로 왔다. 현재는 다섯 살 난 딸과 남편과 단란하게 살고 있다. 한국말도 꽤 잘한다. 창원시에서 실시하는 한글교실에 꾸준히 다닌 결과다. 경남도의 도움으로 창원 주변의 농촌학생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면서 수입도 생기고 보람도 느끼고 있다. 한국인으로 살아가는 것에 자신감과 보람을 느낀 그는 4년 전 귀화를 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한국문화 언어 음식을 가르쳐 주는 곳 있어야 한국인과 결혼 후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묻자 그는 한국의 문화와 음식, 언어를 정부가 나서서 가르쳐주고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안내해 주길 원했다. 다행히 자신은 시부모가 너무 잘해줘 어려움을 넘겼지만 아직도 많은 결혼 이민자들이 시댁과의 관계, 언어 때문에 고통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필리핀의 경우 결혼하면 분가해 시댁과 함께 사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는 “한국은 결혼을 남편과 하는 것이 아니라 남편 친족들과 하는 것 같다”며 “필리핀에서는 결혼하면 시댁과 함께 살지 않는다”고 문화차이를 설명했다. 그는 “남편과 다툴 때 자신을 표현하지 못해 오해를 사고 답답해하는 경우가 많았다”며 “그런 때는 고향생각이 많이 났다”고 말했다. 직업을 안내해 주길 바래 직업을 갖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했다. 레이아씨는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고 학원에 다니면 돈이 많이 든다”며 “창원에는 50여명의 필리핀 이민자가 있는데 대부분 영어강사나 공장에 다니며 맞벌이를 한다”고 말했다. 그동안 시청이나 정부에서 하는 결혼이민자 대상 프로그램이 거의 없었는데 2006년부터 프로그램을 만들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고마워했다. 자녀들 양육 프로그램도 있었으면 레이아씨는 딸이 점점 커 감에 따라 아이들을 올바르게 키우는 법에 대해 관심이 많아졌다. 그러나 아직 이민자 자녀를 위한 교육프로그램을 찾지 못했다. 필리핀에서 결혼해 와 사귀게 된 친구의 경우 아들이 4살인데 아직 한국말이 분명치가 않다. 친구 자신도 한국말을 잘 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들을 가르칠 수가 없다. 레이아씨의 경우 다행히 이웃과 서로 돕고 있다. 레이아씨가 옆집 피아노 학원장의 아이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학원장은 레이아씨 딸에게 피아노와 책읽기 쓰기를 통해 한국말을 가르쳐주고 있다. 레이아씨는 요즘 창원시청에서 개설하는 이민자 가족 프로그램에 푹 빠졌다. 한글교실도 나가고 농촌 지역을 출퇴근하면 영어강사로도 활약중이다. 출퇴근 시간을 줄이기 위해 운전도 배우고 있다. 문진헌 기자 jhmun@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6-08
- “한국어와 직업교육이 가장 필요해요” 창원시 결혼이민자지원센터 정시영 계장, 김보영 건강가정사 “서로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부부 사이에 오해가 생기고 고부간에 갈등을 겪는 경우가 있다. 결혼이민가정에 시급한 것은 한국어 교육이다” 창원시 결혼이민자 한글교실을 열고 있는 정시영 계장(47)과 김보영 건강가정사(31)의 말이다. 결혼이민가정내 의사 소통이 되지 않으면 부부, 고부간의 문제뿐만 아니라 자녀 양육에도 어려움을 겪는다는 것이다. 필리핀 출신 루실라(36)씨의 경우 한국에 온지 6년이 넘었고 아들이 네 살이지만 아직 자신이 한글을 몰라 고민이 많았다. 아들은 또래에 비해 우리말을 잘 하지 못했다. 자신이 아들의 대화상대라는 것을 느낀 그는 요즘 한글교실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다. 레이아(34)씨는 한글을 깨친 덕에 다섯 살 딸과 나름대로 대화를 하고 있다. 그는 “더욱 열심히 해야 딸을 제대로 키울 수 있을 것”이라며 초급반을 떼고 중급반에 신청서를 냈다. 건강가정사 김씨에 따르면 요즘은 남편들이 적극적인 경우가 많다. 결혼 전에 이미 한글교실에 대한 정보를 인터넷으로 찾아 수강신청 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김씨는 “남편이 권하지만 아내가 참여하지 않을 경우 남편이 교재를 가지고 가서 가르치는 경우도 있다”며 “최근 결혼하는 한국 남편들이 많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여성 결혼이민자가 지리를 잘 몰라 혼자 올 수 없어 시부모가 며느리를 데리고 오는 경우도 있다. 스텔라(31)씨는 시아버지와 함께 임신 9개월의 몸으로 30분 거리를 걸어서 교실에 참여하고 있다. 그는 “아직 지리를 몰라 무서워서 버스를 못탄다”고 했다. 정시영 계장은 “결혼이민자들이 한글과 직업 2가지를 얻어야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어설픈 지원보다는 우리말을 익힐 수 있도록 지원하고 직업을 추천해야 이들이 한국인으로 자립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레이아씨의 경우 경남도에서 실시하는 영어강사 과정을 거쳐 농촌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원어민 강사로 참여하고 있다. 레이아씨는 “가계에 도움도 되고 보람도 느낀다”며 “결혼이민자들이 모두 자기 일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편 창원시는 건강가족센터에서 결혼이민자 지원을 함께하고 있다. 창원시 가음동 알뜰생활관에 센터(전화 212-2701)가 있다. 문진헌 기자 jhmun@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6-08
- 6월18일자 인터뷰 2꼭지 - 부산 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 주동옥·김선희씨 6월 18일자 결혼이민자 기획 원고 작성: 박성진 리포터, 전예현 연락처: 010-2273-411 사진: 인터뷰 사진 각 1장, 행사사진 1장 포함해 총 3장 ================================================= 인터뷰 - 부산 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 주동옥·김선희씨 “친정엄마처럼 마음이 통하는 멘토 만들어요 ” 사진1 : 지난 5월 12일 열린 ‘결혼이민자 가족 전통체험 한마당’ 행사에서 참가자들이 제기차기와 윷놀이를 하고 있다. (사진명: 전통체험한마당) 사진2 : 부산 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의 주동옥 계장(왼쪽)과 김성희 간사. (사진명: 주동옥) 부산시의 전체 결혼이민자수는 지난해 4월 3200명에서 올해 5월 7000명으로 두 배나 껑충 뛰었다. 이런 가운데 부산광역시 여성회관은 지난해 3월 결혼이민자지원센터로 지정됐고 한글과 컴퓨터 교실, 육아직원 등 프로그램을 활발하게 운영하고 있다. 2005년 10월 1개 학급으로 시작했던 한글교실이 6개월 사이 4개 학급으로 늘었을 정도다. 특히 부산센터에서는 결혼이민자들이 심리적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멘토 제도’를 활성화하고 있다. 상담업무를 맡은 주동옥(57) 계장은 “20대 초반이 대부분인 결혼 이민자들이 해결해야 할 큰 과제는 언어습득, 시댁과의 갈등 해결 외에도 임신 육아 문제”라며 “친정어머니처럼 여러 가지 고민을 상담해 줄 수 있는 ‘멘토 결연’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난 4월부터 결혼이민자 가정을 방문해 육아 및 자녀 학습 관리를 도와주는 ‘결혼이민자 가정 아동 양육 도우미’ 제도를 운영중”이라고 밝혔다. 결혼이민자들 가정이 급증하는 상황에 대해 주 계장은 ‘문화교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외국에서 온 여성에게 남편과 시댁식구들이 한국 문화와 언어 습득을 일방적으로 요구하고 닦달하면서 갈등이 커지는 경우가 많다”며 “열린 마음으로 서로의 문화 차이를 인정하고 쌍방이 노력해야 성공적인 가정을 꾸려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를 위해 센터에서는 지난 5월 결혼이민자 가족 150여 명이 한자리에 모여 ‘전통체험 한마당’ 행사를 열었다. 캄보디아, 중국, 필리핀, 베트남 등 4개국의 전통 요리 시연과 윷놀이, 투호 등 한국 전통놀이를 함께 즐기며 서로의 문화를 이해하고 배웠다. 주 계장은 “앞으로 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도 각 지역으로 더 확대 신설되고 프로그램도 더 체계적으로 운영돼야 한다”고 말했다. 부산 = 박성진 리포터 전예현 기자 sjpark@naeil.com ==================================================================== 사진: 결혼이민(부산, 트란티응억) 인터뷰-베트남 출신 결혼이민자 트란티 응억 투이씨 “시댁 식구덕에 한국이 더 좋아졌어요” “나는 운이 너무 좋은 사람이예요. 시댁 식구들이 너무 좋고 한국어 배우는 것도 너무 재미있어요.” 베트남 출신 결혼이민자 트란티 응억 투이(25)씨의 말이다. 그는 2년전 남편을 따라 한국에 왔고 부산광역시여성회관 결혼이민자가족지원센터에서 한글을 배우며 새로운 생활에 빠르게 적응해나가고 있다. 예쁜 한국 이름도 지었다. 베트남 이름의 발음과 비슷한 글자를 찾아 ‘진옥수’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은 것이다. 한국 전통문화에도 관심이 많다. 그는 “지난 12일 지원센터에서 열린 전통 체험 한마당에는 남편과 함께 참여했는데 너무 좋았다”며 “특히 윷놀이와 투호가 신기했다”고 말했다. 시댁식구들과 갈등이 거의 없었던 점은 그가 한국생활을 좋아하는데 큰 원동력이 됐다. 그는 “남편과 시댁식구들 모두 자상하게 잘 대해준다”고 말했다. 한국어 공부를 하거나 취업 준비를 할 때 시댁 식구들의 격려가 든든한 뒷받침이 됐다. 하지만 주변의 몇몇 친구들 사례는 그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남편이 심하게 욕해서 힘들다는 사람도 있고, ‘왕소금’ 남편이 돈을 안 줘서 꼼짝도 못하는 사람도 있다”고 말했다. 임신 6개월 된 베트남 출신 친구 한명은 시어머니가 며느리로 인정을 않고 아직도 계속 집을 나가라고 해 힘들어하는 상황이다. 그는 “이제 친구들도 나처럼 행복하게 결혼생활을 꾸려나가고 주변 사람들도 그 친구들을 식구로 인정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여름을 맞으면서 트란티 응억 투이씨에게는 몇가지 소박한 소망이 생겼다. 시댁 식구와 베트남에 다녀오는 것이다. 그는 “아직 시댁 식구와 친정 식구들이 만난 적이 없다”며 “시댁 식구들과 여행 삼아 베트남에 가서 친정 식구와 인사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남편이 며칠씩 휴가 받기가 힘들어 엄두를 못 내고 있다”며 “회사에서 배려를 해준다면 좋겠다”고 밝혔다. 그의 또 다른 소망은 2세를 갖는 것과 취업을 하는 것이다. 그는 “아기를 갖기 전에 취업을 할 수 있다면 더 좋을 것”이라며 “열심히 공부해서 훌륭한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부산= 박성진 리포터 전예현 기자 sjpark@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6-08
- 이라크 사회에 ‘이란신드롬’ 확산 이란이 정치와 종교 영역을 넘어 일반 이라크인들의 경제·사회적 삶까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이라크 시장은 이란산 물건으로 가득하고 젊은이들은 스스럼없이 이란풍습을 수용하고 있다. 정계는 이란의 영향력 강화가 미국과의 마찰을 유발해 이라크가 희생양이 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고 사우디아라비아 일간 ‘아샤르크알오사트’가 보도했다. ◆이란 ‘리알’이 지불수단으로 통용 = 바그다드 시장을 걷다보면 이란상품이 이라크를 ‘점령’했다는 표현이 지나치지 않다. 약국에서는 고객에게 미국·유럽산, 요르단, 그리고 이란제 약 중에서 어떤 것을 원하는지 묻는다. 대다수 이라크인들의 답은 ‘이란제’다. 가격이 제일 싸기 때문. 가전제품을 파는 가게에서도 이란어는 필수다. 제품포장이 온통 이란어로 쓰여 있을 뿐 아니라 다수 제품공급자가 이란인이어서 판매상은 이란어를 배울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이라크 도시에서 이제 이란 화폐인 ‘리알’이 지불수단으로 통용되고 있다. 이란의 영향력은 특히 이라크 남부 시아파 도시권에서 두드러진다. 이라크 시아파 성지인 케르발라와 나자프 거리는 이란 순례자들로 호황을 이루고 있다. 나자프의 한 의류 판매상은 “이란인 순례자들 때문에 지역경제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케르발라의 경우 대부분의 이란 순례자들이 호텔에 숙박해 나자프보다도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다. ◆해시시 길에서 판매…임시결혼풍습도 확산 = 하지만 경제적 이익에도 불구하고 이란의 영향력에 대해 불만을 나타내는 주민들도 있다. 한 은퇴 공직자는 “이란인들이 마약을 들여왔다”면서 “과거 이곳에서는 마약을 찾아볼 수 없었지만 이제는 길에서 버젓하게 해시시가 판매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에는 경찰이 마약 거래를 하기 위해 이곳에 정착한 일가족을 체포하기도 했다. 해시시는 대마초의 꽃이삭과 수지에서 추출한 마약이다. 또 다른 주민은 이란에서 들어온 ‘임시결혼’의 확산에 대해 불평했다. 교사인 그는 “이라크 시아파는 이란과 달리 이런 형태의 혼인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이란 여성과 임시결혼을 하는 남성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설상가상으로 이라크 여성들마저 매춘에 가까운 일시적 결혼에 빠져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젊은세대에 대한 이란의 영향력은 크다. 이라크 시아파 도시들을 중심으로 거의 모든 학교에서 제1외국어는 더 이상 영어가 아닌 이란어다. 일상생활에서도 아랍어 인사 대신 이란어 인사말 ‘쿠비’(khoubi)가 통용된다. 이라크 소녀들은 아랍식 히잡을 버리고 이란식 차도르를 쓰고 있다. ◆이라크 정치권 ‘전전긍긍’ = 다수 이라크인들이 이란의 영향력을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지만 정치인들의 반감은 크다. 최근 한 국회의원이 이란인을 아랍인과 쿠르드, 투르크멘인과 함께 이라크 4대인종으로 지정하자고 제안했다가 거센 비난을 받았다. 세속시아파정당 소속 아야드 자말레딘 의원은 “이란산 먹거리가 이라크 시장을 점령하고, 이란이 문화센터와 도서관을 지원하지 않는 도시가 없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은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말했다. 또 “이라크 시아파 신도들 사이에서 이란 고위성직자들이 인기를 얻고 있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고 개탄했다. 친서방성향의 미탈 알루시 의원은 “지금까지 이란은 이라크 정당에 자금을 제공하고 민병대에 무기를 제공해 왔다. 하지만 이제 이란의 영향력은 이라크 경제 전반으로 확산됐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최근 이라크가 외국계 기업들의 공개입찰 규제를 철폐하면서 이란기업이 에너지수급 등 국가안보에 중요한 산업부문을 잠식할 위험이 높다. 이미 이라크 석유와 가스·전기의 거의 전부가 이란산이다. 알루시 의원은 “이런 상황에서 결국 미국과 이란간 긴장이 고조될 수밖에 없으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이라크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중동의 이슬람국가 중심축은 이란이며, 미국은 이란을 제압하는 것을 중동정책의 핵심으로 꼽는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는 먼저 이라크전쟁을 감행함으로써 과거 갈등관계였던 이란과 이라크의 정서적 유대를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라크 국민들 사이에 퍼지고 있는 이란신드롬은 미국의 이라크점령정책이 실패로 돌아가고 있는 또하나의 예다. 이지혜 리포터 2main@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6-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