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초기' 검색결과 총 9,851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엘리트이혼 줄고 저학력이혼 증가 미국의 상류사회 엘리트 계층에서 이혼율은 낮아지고 있는 반면 생활수준과 학력이 낮은 계층의 이혼율은 높아지고 있다. 지난달 24일 ‘이코노미스트’ 신문은 최근 ‘프린스턴 리뷰’지에 발표된 보고서를 인용해 미국젊은이들의 결혼과 양육에 대한 태도를 보도했다. 고학력자와 저학력자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요지다. 이 보도에 따르면 대학을 졸업한 여성은 미혼모 비율이 4%에 불과하며, 결혼 후 이혼율도 급격하게 낮아지고 있다. 1975~1979년에 결혼한 대졸학력자 가운데 10년 이내에 이혼한 사람의 비율은 29%였다. 그러나 1990~1994년에는 16.5%로 줄었다. 반면 1975~1979년에 결혼한 고교중퇴 이하 학력자는 이혼비율이 38%였으나, 1990~1994년에는 46%로 크게 늘어났다. 고졸학력자도 같은 비교구간에서 35%에서 38%로 약간 상승했다. 고등학교 중퇴 이하의 학력자 중 미혼모 비율은 15%였고, 흑인인 경우는 67%였다. 맨하탄 연구소의 케이 히모위츠는 ‘미국의 결혼과 계급’이란 책에서 ‘결혼차이’가 미국의 불평등을 조장하는 주요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친부모와 같이 사는 중산층 아이들은 성공적인 사회화 과정을 거침으로써 학교성적도 우수하고 좋은 직업을 갖게 된다. 반면, 한쪽 부모하고만 사는 경우 학교성적이 낮고 부모의 전철을 밟게 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연소득 7만5000달러이상인 가정의 어린이는 92%, 연소득 1만5000달러 이하인 가정의 어린이는 20%만 친부모와 살고 있다. 물론 양쪽 부모 모두가 돈을 벌기 때문에 편부모와 살고 있는 경우보다 연소득이 높다고 해석될 수 있다. 룻거스 대학 내셔날 메리지 프로젝트의 데보라 데포 화이트헤드와 데이비드 폽노스는 “결혼은 부를 축적하는 제도이다. 독신자보다 기혼자들이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한다”고 설명했다. 기혼자들은 부부가 모두 경제활동을 하며, 미래계획을 세우고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기술도 함께 습득한다. 경제적으로 더 많은 부를 쌓을 재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혼은 행동규범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이파 대학의 아브너 아이투브와 어번 연구소의 로버트 러맨은 “미국 기혼남성은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가족과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강해지며 술과 마약에 중독되는 일도 미혼자들에 비해 적다”고 말했다. 이들의 조사결과 독신자에 비해 기혼자들의 봉급은 최고 40%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진성 리포터 jinny513@hotma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6-07
- 세대동질감 확인하는 ‘정신적 문신’ 87년 6월항쟁은 당시 청년층에게 강렬한 기억이다. 표적집단심층좌담(FGD)에 참여한 6명의 수도권 40대 화이트칼라들은 당시 처한 상황은 제각각이었지만 20년이 지났어도그 느낌은 기억하고 있었다. 87년 얘기를 꺼내자 “전두환 대통령이 ‘본인은…’하면서 TV에 생중계됐어요” “그거 끝나자 전국이 벌떼처럼 일어났었죠” “시청이 꽉 찼었죠” “서울역 앞에 엄청난 군중들” 등 봇물터지듯 말이 이어졌다. 이 세대들이 서로간의 동질감을 확인하게 하는 일종의 ‘정신적 문신’으로 느껴졌다. ◆”가만히 있는 게 옳은 거냐 방황” = FGD 참석자들은 20년 전인 87년 6월을 다양한 입장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맞이했다. 대학생, 군인, 제대후 직장을 가지기 전, 또는 직장인의 입장에서 6월을 맞이했다. 당시 청년층의 스펙트럼이 드러났다. 일부는 시위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지만 군부독재가 종식되어야 한다는 생각만 한 경우도 있었다. 교육직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박기환씨는 시위에 참여는 안했지만 최루탄엔 맞아봤다. 박씨는 “정권이 바뀌어야 된다는 생각을 간절히 했다”고 말했다. 당시 역시 직장인이었던 박준영씨는 “기성세대가 못하는 걸 젊은 세대가 해준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반대로 정경식씨는 당시 군대에서 진압군 훈련을 받으면서 시위대 안에 북한의 불순분자가 섞여 있다는 말을 그대로 믿고 있었던 경우다. 중소기업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장선중씨는 불어나는 시위대를 보면서 혼란스러운 상태로 그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군대 막 제대하고 직장생활하고 있었는데 저걸(데모) 해야 되나, 가만히 있는 게 옳은 거냐 참 개인적으로 방황한 그런 시기를 보낸 것 같다”고 회상했다. ◆“그땐 불안했지만 지금은 사회 변화” = 처한 상황은 제각각이었지만 6월 항쟁이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줬다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었다. 자유, 인권, 민주화 등 사회적으로 큰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었다. “그때는 이 나라 앞길이 어떻게 되려는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되돌아보면 그 항쟁을 일으켜야 지금 이렇게 편한 사회로 될 수 있었나 참 놀랍다”(박기환) 그러나 먹고 사는 문제의 최일선에 있는 이들로서는 민주화 등이 만개한 것에 비해 경제 등 기대에 미흡한 부분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박준영씨는 “6·29 이후에 노조 데모가 엄청났다”면서 “자기 주장을 해야 되는 건 맞는데 아직 우리가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되는 상황인데너무 빠른 것 아니냐”고 말했다. ‘속도조절’이 안 된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최민영씨는 “민주화 쪽으로 많이 발전을 했는데 또 이쪽(경제)으로는 영 아니다 하시는 분들도 있다”고 말했다. ◆20년전 6월항쟁, 10년전 IMF, 다음엔 무엇? = 이들이 경제 문제에 민감하게 된 것은 현재의 어려움도 있지만 대부분 첫 아이를 막 낳았거나 이제 본격적인 결혼생활을 하려는 때 겪은 97년 IMF외환위기의 경험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큰애가 97년 12월생인데 애 분유는 먹여야 될 것 아니냐. 그때 마트 가서 분유 이만큼 산 기억이 난다”(배성규) “직장이 과연 살아남느냐. 서바이벌 게임이라고까지 얘기하면서 직장을 다녔다”(박준영) 등의 발언은 이들이 그 때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보여준다. 배씨는 “6월은 정신이고, IMF는 우리에게 닥치는 의식주”라고 정리했다. 20년 전에 민주화를 이뤄낸 이들 세대는 10년 전엔 우리 경제가 세계경제에 편입되는 시점의 고통을 공유했다. 이제 이들은 그 다음은 무엇이 와야 하느냐를 고민하고 있다. 김형선 기자 egoh@naeil.com 6월항쟁 당시 본인 상황과 평가 장선중(44) 군대를 막 제대하고 부산 동아대 근처 그 쪽에서 직장생활하고 있었는데 툭하면 학교 근처에 최루탄 가스들이 회사 공장에도 막 날라오고… 막연히 간첩이 있을 것이다 이런 생각도 하고, 저 학생들이 진짜 옳은 것인가 굉장히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냈습니다. 87년도는 개인적으로 혼란을 느꼈다고 하지만 뭐 제가 영향을 받고 그런 건 사실 없었죠. 정치 하는 사람들이나 학생들이나 저쪽 부류의 일들이다 이렇게 하고 나는 내가 할 일 열심히 하면 된다 이랬는데, MF라는 것은 그야 말로 피부로 확 와 닿는 그런 시기였거든요. 봉급이 제 때 안 나오고 소비도 줄여야 되고 우리 거래 관계에 있던 사람들이 부도나서 문 닫는 일이 속출하고 그랬죠. 박기환(48) 한번은 청계천 쪽에 저녁에 술 취해 가지고 데모 피해 간다고 골목으로 가다 보는데 제 뒷머리를 딱 쏘대요. 지금도 흉터가 있어요. 뒷머리에. 제가 살아있는 게 다행인 것 같아요. 빨리 정권이 바뀌어야 된다는 생각은 간절히 했죠. 6월 항쟁 그때 막 전국적으로 데모하면 이렇게 혼란스러울 때 과연 솔직히 이 나라 앞길이 어떻게 되려는가 하고서 불안하기 짝이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에 와서 그걸 되돌아보면 그 항쟁을 일으켜야 지금 이렇게 다 변화 돼 가지고 지금 이렇게 편한 사회로 될 수가 있었나 그게 참 놀랍고 그래요. 어쨌든 질서가 지금 제대로 장착이 됐냐는 시간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로써는 그 과정에서 부지런히 지금 기반을 닦아 나가면서 전진하고 있다. 경제든, 사회 문화든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박준영(46) 그 당시에 학생들은 전면에 나서고 우리는 뒤에서 도로에서 응원하고 뭐 담배 갖다 주고 이런 것… 그때 생각하면 학생들이 기성세대가 못하는 것을 젊은 세대들이 해준다. 6·29 이후에 노조 데모가 엄청 났었어요. 그런데 그 전에는 근로자들이 이렇게 하려고 그래도 사실 못했던 일들이 많았거든요. 그 이후부터는 근로자들의 자기가 위상이랄까 입지를 많이 올릴 수 있는 것은 됐지만은 사실 너무 빠르지 않았는가. (IMF 때) 직장이 과연 살아 남느냐, 서바이벌 게임이라고까지 얘기를 하면서 직장을 다녔어요. 정경식(40) 제가 87년 7월에 제대를 했습니다. 그때 어땠냐면은 여기에 빨갱이가 있다. 얘네들을 속출해 내야 된다. 중대에서 사격술이 좋은 사람들을 가져다가 저격수가 있었죠. 각 중대마다 5명의 저격수가 있었어요. 사실 87년에 그렇게 이제 일이 벌어졌을 때 그 다음 88올림픽인데. 올림픽이라는 것은 사실 세계적인 경기잖아요. 파티인데. 그런데 이걸 갔다가 치루기 위해서는 진짜 나라가 그렇게 혼란스러우면 치룰 수가 없잖아요. 뭔가 현실적으로 이 안 그러게끔 강압으로 누르던지, 뭔가 방법을 써야 됐을 때에요. 배성규(43) 당시엔 중간고사, 기말고사라는 게 없었죠. 거의 안 보고 리포트로 대체하고 그랬었는데… 저희는 그렇게 심하게 하는 학과는 아닌데 초반기에 (학생들이) 잡혀가고 이러다 보니까 어수선하더라고요. 그 당시에 운동권이라든가 뭐 저기 국회의원 몇 명 가 있죠 지금. 지금 보면 참 아쉬운 게 그 당시에 그렇게까지 한 사람들이 실제 해보니까 또 그렇지 않거든요. 6.29라는 자체는 우리가 말하는 정신이죠. 정신. 인권 그것 때문에 하는 거고, IMF 실제 우리가 닥치는 의식주죠. 먹고 사는 게 걱정이 되는데 저 같은 경우는 저희 큰 애 97년 12월 생인데 그때 회사가 거의 다 그러다 보니까 이제 어느날 갑자기 안 나오게 되면 애 분유는 먹여야 될 것 아니에요. 그때 마트에 가서 분유 이만큼 산 기억이 나요. 카드 갔다가 밀리면 안 되니까. 그런 어려운 생각이 나네요. 최민영(40) 아르바이트로 DJ했었습니다. 대학 앞에서. 저는 뭐 데모 같은데 끼어서 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저희 고등학교 동기들 중에서 데모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제일 많았습니다. 사실 이게 더 와 닿다, 저게 더 와 닿다 그런 건 없고요. 별로 그런 것 없습니다. 그런데 저 같은 경우는 저는 IMF 터질 때는 공무원 이었거든요. 지금도 보면은 이제 민주화 쪽으로 많이 발전을 했지만 또 이쪽(경제)으로는 영 2007-06-07
- 시위대의 어머니, 남대문시장 상인들 6월항쟁 인물 야사. 들꽃이 지천으로 피어 아름다웠습니다 1 - 시위대의 어머니, 남대문시장 상인들 “학생들이 막 도망 오면 숨겨줬지. 그 땐 다 그랬어.” 87년 6월 서울역 신세계백화점 명동 일대에서 시위를 하다 경찰에 쫓겨 흩어진 시위대를 숨겨주던 남대문시장 상인들에 대한 취재는 예상보다 어려웠다. 우선 20년 전 이곳 남대문시장에서 장사 한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았다. 시장을 관리하고 있는 서울남대문시장(주) 관계자는 “1만여 곳의 점포 중 당시부터 영업하고 있는 곳은 20% 정도”라고 말했다. 그렇게 긴 세월이 흐른 것인가. 취재에 나서기 전엔 20년이 짧지 않은 세월임을 깨닫지 못했다. 어렵게 만난 고참 상인들이 반가웠다. 그러나 그들은 사진 찍기를 거부했다. 87년 6월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지도 않았다. 취재하는 기자를 귀찮아했다. 액세서리 가게를 하는 엄 모(여·60)씨는 “장사하는 사람은 장사가 잘 돼야 여유가 있는 법”이라고 말했다. 87년 당시엔 호황이었다. 다들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장사해서 관리비다 뭐다 줘야 하는데, 수입이 줄어드니 마음이 안 좋다”고 한다. 지역에 대형 할인점이 속속 들어선 지난 20년의 유통질서 변화는 이들 삶에 구체적으로 스며들어 있었다. 남대문시장에 뚫린 8군데 골목을 드나들며 시장을 한 바퀴 돌았을 즈음, 큰 길에서 꺾어진 골목에서 30여 미터 들어간 곳에 자리한 오래된 떡집에서 강성애(여·57)씨를 만났다. “그 해 여름에? 데모 많이 했지. 학생들이 막 도망 오면 많이 숨겨줬어. 그땐 다 그랬어.” 20년 전 서른 일곱 살이던 강씨는 고종사촌 언니가 경영하는 떡집에서 일을 하다 경찰에 쫓겨 온 학생들을 2층 식당으로 3층 가게로 피난시켰다. “학생들 올려 보내고 셔터를 바로 내렸어. 경찰이 쫓아와 셔터를 올리려고 하면 ‘최루탄 때문에 괴로워 죽겠는데 어디서 셔터를 올리느냐’고 막 야단 쳐서 보냈지.” 경찰이 무섭지도 않았다 한다. 강씨는 지금은 파출소장이 된 친동생을 포함 친척 중 네 명이 경찰이었다. 당시 경찰이던 고종사촌 오빠에게 강씨는 왜 학생들을 왜 괴롭히냐고 물었는데, 오빠는 “나라에서 시키니까 할 수 없이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좁은 골목 안에서 학생들을 숨겨주었지만 안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옆 가게 누구도 경찰에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은 바깥 동태를 서로 알려주며 충실한 정보원 역할을 했다. 당시 전두환 정권은 일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잃었고, 학생 시위대는 이들의 마음을 얻었다. 시장 골목 안에서 고립된 것은 정권이었다. 당시 대학 4학년이었던 김정수(44)씨는 “주황색 바가지에 보리차를 그득 담아 얼음을 동동 띄워 학생들에게 나눠주는 냉차 아주머니, 때론 야쿠르트를 비닐봉지에 5개 6개씩 담아 학생들의 손에 쥐어주던 아저씨, 팔던 손수건을 학생들의 손에 쥐어 주며 마스크 대용으로 쓸 수 있도록 도움을 주셨던 아주머니 등등 좁은 시장판에서 나중에는 도망다니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군이 많아졌다”며 “6월 18일 이후엔 남대문에서 잡힐 걱정은 전혀 하지 않게 되었다”고 기억했다. “왜 숨겨 주었냐고? 학생들이 잡히면 다 죽는다고 하더라.” 강씨는 그게 무슨 일이었는지 지금도 모르지만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큰 영향을 받았다. 당시 시위대는 “학살정권 고문정권 전두환을 타도하자” 등의 구호도 외쳤다. 박종철군이 경찰 고문으로 사망했고, 6월에는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던 때였다. 짧았던 여름은 가고, 20년이 흘렀다. 투표할 때마다 ‘당첨자를 맞추지 못하던’ 강씨는 97년과 2002년 연이어 자신이 찍은 사람을 대통령으로 맞았다. 그러나 기대는 실현되지 않았다. “김대중씨는 서민을 위해 잘 할 거라고 생각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딸 아이들이 찍으라고 해서 투표했는데, 둘 다 실망했다”고 말한다. 지금은 박근혜 이명박 두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사람들이 많이 한다고 했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역시 생활이다. 강씨는 고종사촌 언니가 하던 떡가게를 물려받아 경영을 하고 있다. 시위대를 숨겨주던 이곳에서 열심히 일해 아이들을 모두 대학 졸업시켰고, 결혼도 시켰다. IMF는 시장에서 떡집을 하는 그에게도 타격을 주었다. 강씨는 “97년을 정점으로 장사가 어려워졌다”고 말했다. 그러나 강씨나 남대문시장에서 가게를 갖고 일하는 사람들은 경제적인 어려움은 적다. 문제는 남의 집에서 일하는 임노동자들이다. “없는 사람과 있는 사람 차이는 갈수록 벌어지는 것 같다”는 게 강씨의 느낌이다. 양극화는 강씨와 이웃 가게에 일하는 사람들의 삶에도 구체적으로 스며들고 있다. 세를 얻어 하는 것이지만 자신이 경영하는 가게를 가진 상인이 “갈수록 살기 어려운 것 같다”고 말한다. 20년 전에 비하면 말하는 자유는 많이 생긴 것 같은데, 살아가는 자유는 여전히 부족하다고 느낀다. 남대문시장(주) 관계자는 “상가 관리비를 못 내는 가게가 많지는 않지만 장사가 잘 안되니까 쉽게 내지 못 하는 경향은 늘어났다”고 말했다. 그는 “점포 종업원을 하다 돈을 벌어 다른 곳에 가게를 차리거나, 남대문시장에서 돈을 벌어 다른 곳으로 확장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어려움을 겪는다”면서 “가만히 있어도 손님이 찾아오는 이곳과 다른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해 생기는 어려움도 많다”고 지적했다. 강씨는 일본인 관광객들이 가게 앞에 줄을 지어 한국의 떡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을 보고 한 달음에 다가가 흥정을 한다. 상가에서 일본인과 중국인을 상대로 장사를 할 수 있게 흥정이나 셈 하는 방법을 적은 일본어 중국어 회화책을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87년 여름 민주주의를 품었던 남대문시장 상인들은 그날도 오늘도 치열한 생존 경쟁을 치르고 있다. 정연근 기자 ygjung@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6-07
- <특별취재>중국망 취재진 현장법사 서역기행로를 가다 ② 중앙아시아의 고도 사마르칸드 키르기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사이에는 한 시간의 시차가 있다. 차가 도착한 타스칸에서는 현지의 유명한 중국식당인 신상하이주점이 대원들을 흥분시켰다. 타스칸은 우즈베키스탄어로 ‘돌도시’라는 뜻이다. 거대한 돌들이 많아 그 같이 불리는데 역시 돌로 만든 분수, 극장, 박물관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었다. 각양각색의 분수는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아 이 아름다운 도시에 생기와 활력을 주고 있었다. 사마르칸트는 저라푸상강 계곡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티무르제국의 시조인 티무르대제(1336~1405)의 능이 있는 곳이다. 제국 시기에 건설된 수많은 궁전과 능묘 중 그의 능이 가장 장엄하고 아름답다. 티무르대제의 능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유명한 ‘레키스탄’ 신학원과 티무르대제의 왕비와 아들의 묘가 있다. 거대한 신학원 건물들은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모든 건물이 사람들로 하여금 전율을 일으키게 할 정도다. 사마르칸트 고성유적 옆에는 실크로드의 유명한 중화문 유적이 있는데 현재는 거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대신 이곳 박물관이 현지에서 출토된 문물과 벽화를 보존하고 있다. 영웅을 숭상하는 텔메츠 텔메츠는 우즈베키스탄 남부 아무강 지역에 있으며 아프가니스탄에 인접해 있다. 중국 한나라의 장건이 서역 정벌에 나설 때 이곳에 들렀다. 이곳은 사마르칸트의 통치자 티무르의 고향이기도 하다. 독특한 문화와 건축스타일, 건축학유파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다. 현장법사는 대당서역기에서 이곳을 ‘제샹나국’이라 적었다. 현지 풍속에 따르면 새로 결혼한 사람은 반드시 현지의 명승지나 열사기념비를 찾아 예배를 드리거나 영웅의 조각상을 찾아 의식을 치르고 경의를 표해야 한다. 우리 일행은 운 좋게도 두 팀의 신혼부부가 티무르성곽에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테먼관은 우즈베키스탄 카스피해 서안, 코카서스 이남의 달반트 부근의 산 입구에 있다. 현장법사에 따르면 이곳은 당시에도 좌우에 산이 이어져 있고 산세가 매우 험준한 곳이다. 산 입구에는 문이 설치돼 있고 문에는 수많은 쇠방울이 달려있어 ‘테먼(철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산세는 여전히 험준하지만 현장법사가 당시 매우 좁은 길이라고 칭했던 곳은 이미 도로로 바뀌었다. 이어 현장법사가 저밀국이라 부른 텔메츠 고성을 지나 우즈벡을 뒤로 하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갔다. 전쟁과 평화의 땅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테러활동으로 아프가니스탄은 폭발, 사망, 위험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진실한 면은 베일에 가려졌고 공포스럽고도 신비스럽게 변화됐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라이즈 의원이 우리를 위해 경호팀을 조직해주어, 우리는 네 대의 차에 20명이 탑승했다. 이들은 구형 총을 메고 칼을 찼으며 어떤 이는 복면을 쓰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검문소는 오직 세 종류의 사람들만이 통과할 수 있다고 한다. 유엔원조기구 인원, 군대, 그리고 특별히 허가된 언론인이다. 때문에 중-우 우호협회의 옌라오용 주석이 기자증명서를 발급해주어, 일행은 통관검역을 마친 후 우즈벡과 아프간 사이의 ‘우의교’를 건넜다. 그날의 목적지는 카불이었는데 도중에 해발 3000m의 힌두쿠스산을 넘어야 했다. 긴 풀이 자라지 않는 산에서 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계곡물 옆에 초지가 있고 산양과 낙타가 있는 풍경이 매우 아름다웠다. 아프가니스탄 남부는 지금도 전쟁 중이다. 전운 속에 통과한 카이볼 고개 우리는 카불을 출발해 미군과 유엔군, 아프간군의 기지를 줄곧 지나갔다. 모든 곳에서 경비가 삼엄했다. 입구는 병사가 지키고 있었고 도중에 완전무장한 ‘험머(미군차량)’가 때때로 길을 지나갔고 무장헬기가 공중을 떠다니고 있었다. 파키스탄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힌두쿠스 산맥의 중요한 고개인 유명한 카이볼 고개를 통과해야 한다. 지형은 매우 험하며 오사마 빈 라덴이 이곳에 숨어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험난한 산길을 지나 무사히 입국수속을 마치고 파키스탄 땅을 밟으니 이국적인 우유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이사와, 간다라 불교의 발원지 서기 2세기, 가니스가왕은 바이사와에 도읍을 건설하고 불상석조를 위주로 한 간다라불교문화를 창조했다. 왕조의 변천에 따라 인도와 페르시아, 그리스 문화가 바이사와를 휩쓸고 지나가며 이곳을 동서양 문화가 융합된 지역으로 만들었다. 현장법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바이사와를 거쳐 파키스탄으로 들어갔으며 대당서역기에서 바이사와를 ‘꽃과 열매가 무성한천국의 나라’로 묘사했다. 바이사와는 산스크리트어로 ‘백가지 꽃의 도시’라는 뜻. 바이사와 현지의 주요민족인 파탄족은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인 민족의 하나로 모두들 몸매가 늠름하다. 몇 세기 동안 수많은 파탄족은 그들의 명예로운 규칙을 지켜왔다. 충성과 용감함, 보복을 강조하는 것이다. 파탄족이 거주하는 부락지역은 파키스탄 국법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으로 파탄족의 부락규칙만이 통용된다. 하지만 바이사와 박물관에는 일대의 사원에서 수집한 불상이 빼곡히 진열돼 있다. 색은 선명하고 표정은 비감하거나 평안하다. 바이사와에서 동북쪽으로 40km 떨어진 지역은 고도유적지 ‘차사다’로 현장법사가 지나간 곳이지만 지금은 거대한 묘지로 변해 있다. 대신 인근 탁트이바이에는 사원 유적이 남아 있어, 1980년 최대의 간다라 불교유적지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탁시라에서 이슬라마바드까지 바이사와에서 이슬라마바드까지는 182km인데 차량대열이 이 길을 지나는 데 아홉시간이 걸렸다. 불교 유적지가 너무 많아 차마 빨리 지나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이사와를 출발한 차량대열은 카불강과 인도강이 합해지는 지점에 도착했다. 이곳은 실크로드에서도 위험하기로 유명한 지역의 하나이다. 현장법사는 당시 이곳 부근에서 출발해 인도강을 건넜다. 탁시라 유적지는 이슬라마바드에서 서북쪽으로 30여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2500년전에 건설된 고도이다. 견고하면서도 크고 높은 성곽과 정교한 불탑, 금옥이 휘황찬란한 사원과 사실적인 인물조각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어 이 도시의 화려한 과거를 짐작할 수 있다. 현장법사는 탁시라에서 2년을 거주했고 설법을 강연하여 현지인의 환영을 받았다. 지금도 현장법사와 관련해 신기한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졸리안 불교유적지는 현장법사가 오래 설법한 곳으로 당시 남아시아 불교도들까지 이곳을 찾아왔다고 한다. 유적지에 들어서니 긴 수염을 기른 백발의 노인이 일행을 인도해 수많은 스님들의 좌대를 지나 비교적 큰 좌대 앞에 도착해 완벽하게 보존된 조각상을 가리켰다. 그가 바로 현장법사였다. 정리 허신열 기자 syheo@naeil.com 중국망 취재진은 중국 시안에서 인도 나란타까지, 1300년 전 불법을 얻고자 현장 법사가 떠난 서역기행을 그대로 따라가며 저 위대한 고승의 자취를 기록했다. 현장법사가 걸어간 길의 총연장은 무려 2만5000km로 이른바 실크로드라 불리는 동서횡단로가 이에해당한다. 본지는 이 기록의 일부를 세 번에 나누어 싣는다. 전문과 관련 사진을 비롯한 자세한 내용은 중국망 한국어판 홈페이지에 전자책으로 제공한다.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6-07
- 연애도 학원서 배우는 중국 신세대 중국 광저우 중샨구에서 연애코치 학원이 생겨서 눈길을 끌고 있다. 11일 ‘광주일보’는 이제 “사랑해”라는 말을 하는데도 전문교육기관이 생겨났으며 시간당 200위안(2만4000원)에 연애하는 법을 강의하고 있다고 전했다. 연애코치 학원은 현대사회 사람들이 진정한 사랑을 찾기가 훨씬 더 어려워졌다는 점과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보편적인 연애의 기술을 터득하지 못하는 점에 착안해 설립됐다. 학원 관계자들이 말하는 설립 목적은 사랑의 기술을 가르쳐주고 사랑하는 사람을 쉽게 놓쳐 평생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코치하는 것이라고 한다. 즉 연애를 하면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문제들을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도록 기술을 터득시켜주는 것이다. 연애코치학원의 책임자인 리우 씨는 과거 결혼관련 상담 전문가였다. 그는 “자신의 경력을 살려 결혼 전 연애시절부터 사람들의 사랑에 관한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다”고 밝혔다. 그에 따르면 “연애는 누구나 다 하는 것이지만 많은 사람들이 작은 부분을 놓치기 일쑤라며 실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연애의 기술을 배워야”한다고 주장했다. 리우 씨에 따르면 연애코치는 일반적으로 시간당 200위안 정도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견적을 내기 위해선 우선 상담을 받은 후 그 결과물에 따라 달라진다고 한다. 대부분 교육은 대화로 진행되며 코치들은 학생들의 어려운 점들을 다 듣고 구체적인 해결방안을 마련해 준다고 한다. 이와 같은 연애코치학원들의 주 고객층은 젊은 화이트칼라다. 이들은 바빠서 연애할 시간도 없다면서도 동시에 연애상대를 원하고 있다. 한 젊은 여성은 연애교육을 받기 전 남자친구와 자주 큰 다툼 후 자살을 생각하곤 했다고 한다. 하지만 교육 후, 자신의 일이 너무 바빠서 남자친구와 함께 할 시간이 부족해 대화가 없었던 게 가장 큰 문제였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연애 코치에 대해 시민들은 두 가지 반응을 보이고 있다. 우선 실제로 많은 남성들이 호감을 갖고 있는 여성에게 어떻게 고백해야 할지 난감해 할 때가 많기 때문에 연애의 기술과 기교는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다른 한편에서는 사랑은 진정한 감정의 교류이지 기술이나 기교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기술과 기교만을 통해서는 진정한 사랑의 표현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최아람 리포터 annearchoi@hotma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5-17
- <내일시론>한국 교육 획기적으로 변해야 한다 한국 교육 획기적으로 변해야 한다 한 손에는 안내책자를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유모차를 끌며 조기유학박람회장을 도는 30대 초반의 젊은 엄마. “어차피 영어를 배우기 위해 유학을 보낼 것이면 하루라도 빨리 보내는 것이 나을 것 같다”며 두 돌 아들을 업고 박람회장에 나온 40대초반의 아빠. 이들은 우리 교육의 위기를 알리는 자화상이다. 어디 그 뿐이랴. 우리 주변에는 한국 교육이 잘못됐음을 보여주는 징후를 도처에서 확인한다. 한국 최고의 대학으로 천하의 영재만 모인다는 서울대에 입학했으나 그 교육내용에 곧 실망해 미국의 아이비 리그 대학으로 전학하는 학생이 늘고 있다는 보도도 ‘빨간불 한국교육’을 알리는 지표이다. 부모들의 세계적인 교육열 덕분에 선진국 문턱까지 들어섰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이제 너도 나도 한국 교육은 실패작이라는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고 교육시키기 어려워 나라를 떠나겠다는 사람과 결혼을 못하겠다는 젊은이가 늘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획일적 교육제도로는 선진국 진입 어려워 세계적인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 박사도 현재의 한국 교육으로는 미래가 없음을 경고하고 있다. 토플러 박사는 “산업화 시대 근로자 양성을 위한 공장식 교육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것은 문제”라며 다변화된 형태의 교육제도와 내용이 필요함을 강조했다. 그는 이어 관료주의 폐단을 하루 빨리 시정하고 교육제도를 혁신하지 않는 한 한국교육은 성공할 수 없다며 발상의 전환을 주문했다. 현재와 같은 획일적 교육으로는 한국 교육에 미래가 없다는 데에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도 동의하고 있다. 그는 한국경제의 샌드위치 위기가 더 심해지고 있는데 교육이 문제라며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획일적인 교육제도를 21세기에 맞춰야한다고 강조했다. 그렇다. 선진국 진입을 위해서는 교육정책이 변해야 한다. 21세기는 인재가 경쟁력인 시대이다. 교육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살리지 못하는 교육이 존재하는 한 선진국 진입은 어렵다. 교육이 국민의 고통인 세상에서 3만달러 달성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녀 과외비 때문에 엄마가 파출부 노릇을 해야하고 자녀 해외유학을 위해 노후를 준비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선진국 진입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무엇보다 절실한 것은 공교육 정상화이다. 학생과 학부모가 공교육기관을 믿고 의지하게끔 공교육기관 경쟁력을 높여야 한다. 물론 사교육을 죽일 수는 없다. 두 부문이 서로 경쟁하면서 서비스의 질을 높일 때 한국 교육도 살고 경제도 살 수 있다. 정부도 규제 일변도는 지양해야 한다. 사립대의 경우 입시 자율성을 보장하고 자립형 사립고도 늘려야 한다. 획일화 대신 다양성과 창의성이 보장돼야 한다. 하향평준화와 함께 중등교육의 가장 큰 문제점은 영어교육 부실이다. 우리나라는 무역으로 먹고 사는 나라로 국제어인 영어는 국민 모두 자유롭게 말해야 하는 시대에 돌입하고 있다. 너도 나도 영어 배우러 외국으로 가는 바람에 애써 벌어들인 달러를 소비하고 있다. 영어 교육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대학을 나오면 외국인과 자유롭게 영어대화를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영어 배우겠다고 두세 살 때부터 외국에 나가야하는 풍토는 시정돼야 한다. 중국이 급부상하는 상황에서 많은 사람이 중국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도록 중국어 교육을 강화할 필요도 있겠다. 공교육 정상화와 대학경쟁력 향상 무엇보다 시급 토플러 박사 지적대로 한국이 21세기를 주도하려면 현재의 획일적인 교육시스템을 21세기형으로 바꾸는 것이 필요하다. 이와 함께 중국과 일본 사이에 끼어 샌드위치가 된 상황을 극복하고 경제와 국가경쟁력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인재의 산실인 대학 경쟁력을 선진국 수준으로 올리는 것이 절실하다. 국내의 일류대학도 해외에 나가면 명함도 못내밀고 글로벌 인재의 양성에 소홀해 국제경쟁력은 중국 싱가포르 등 아시아 경쟁대학에도 밀리고 있다. 한국 대학은 여전히 들어가기는 어렵고 나오기는 쉬운 20세기 대학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무한경쟁의 세계화시대에는 글로벌인재라야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그런 인재를 배출하는 대학이라야 21세기에 생존할 수 있다. 외국 유명대학으로 인재를 빼앗기는 것이 아니라 해외 젊은이들이 다투어 한국대학입학원서를 쓸 수 있도록 대학들의 경쟁력을 향상시켜야 한다. 이제 한국대학도 우물안 개구리가 아니라 세계 유명대학과 경쟁하는 글로벌 대학이 되어야 한다. 이제 교육과 대학은 우리 국민의 자랑이고 자부심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획기적으로 변해야 한다. 정 세 용 논설 주간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6-05
- 중국망 현장법사 서역기행의 족적을 따라서-2 사마르칸트에서 이슬라마바드까지 … 전쟁이 지배라는 지역 사진 메인_이슬람유적지 중국 키르기스에서 우즈베키스탄으로 가는 도중 현장법사가 지나친 길목에 자리 잡은 이슬람 유적지. 2.우즈베키스탄 3. 아프가니스탄 4. 바이사와 5. 인도강 5. 이슬라마바드 중앙아시아의 고도 사마르칸드 키르기스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사이에는 한 시간의 시차가 있다. 차가 도착한 타스칸에서는 현지의 유명한 중국식당인 신상하이주점이 대원들을 흥분시켰다. 타스칸은 우즈베키스탄어로 ‘돌도시’라는 뜻이다. 거대한 돌들이 많아 그 같이 불리는데 역시 돌로 만든 분수, 극장, 박물관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었다. 각양각색의 분수는 한 순간도 멈추지 않아 이 아름다운 도시에 생기와 활력을 주고 있었다. 사마르칸트는 저라푸상강 계곡지대에 위치해 있으며 티무르제국의 시조인 티무르대제(1336~1405)의 능이 있는 곳이다. 제국 시기에 건설된 수많은 궁전과 능묘 중 그의 능이 가장 장엄하고 아름답다. 티무르대제의 능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유명한 ‘레키스탄’ 신학원과 티무르대제의 왕비와 아들의 묘가 있다. 거대한 신학원 건물들은 장관을 이루고 있으며 모든 건물이 사람들로 하여금 전율을 일으키게 할 정도다. 사마르칸트 고성유적 옆에는 실크로드의 유명한 중화문 유적이 있는데 현재는 거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대신 이곳 박물관이 현지에서 출토된 문물과 벽화를 보존하고 있다. 영웅을 숭상하는 텔메츠 텔메츠는 우즈베키스탄 남부 아무강 지역에 있으며 아프가니스탄에 인접해 있다. 중국 한나라의 장건이 서역 정벌에 나설 때 이곳에 들렀다. 이곳은 사마르칸트의 통치자 티무르의 고향이기도 하다. 독특한 문화와 건축스타일, 건축학유파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다. 현장법사는 대당서역기에서 이곳을 ‘제샹나국’이라 적었다. 현지 풍속에 따르면 새로 결혼한 사람은 반드시 현지의 명승지나 열사기념비를 찾아 예배를 드리거나 영웅의 조각상을 찾아 의식을 치르고 경의를 표해야 한다. 우리 일행은 운 좋게도 두 팀의 신혼부부가 티무르성곽에서 의식을 거행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테먼관은 우즈베키스탄 카스피해 서안, 코카서스 이남의 달반트 부근의 산 입구에 있다. 현장법사에 따르면 이곳은 당시에도 좌우에 산이 이어져 있고 산세가 매우 험준한 곳이다. 산 입구에는 문이 설치돼 있고 문에는 수많은 쇠방울이 달려있어 ‘테먼(철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산세는 여전히 험준하지만 현장법사가 당시 매우 좁은 길이라고 칭했던 곳은 이미 도로로 바뀌었다. 이어 현장법사가 저밀국이라 부른 텔메츠 고성을 지나 우즈벡을 뒤로 하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들어갔다. 전쟁과 평화의 땅 아프가니스탄 전쟁과 테러활동으로 아프가니스탄은 폭발, 사망, 위험의 대명사처럼 인식되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진실한 면은 베일에 가려졌고 공포스럽고도 신비스럽게 변화됐다. 아프가니스탄에서는 라이즈 의원이 우리를 위해 경호팀을 조직해주어, 우리는 네 대의 차에 20명이 탑승했다. 이들은 구형 총을 메고 칼을 찼으며 어떤 이는 복면을 쓰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의 국경검문소는 오직 세 종류의 사람들만이 통과할 수 있다고 한다. 유엔원조기구 인원, 군대, 그리고 특별히 허가된 언론인이다. 때문에 중-우 우호협회의 옌라오용 주석이 기자증명서를 발급해주어, 일행은 통관검역을 마친 후 우즈벡과 아프간 사이의 ‘우의교’를 건넜다. 그날의 목적지는 카불이었는데 도중에 해발 3000m의 힌두쿠스산을 넘어야 했다. 긴 풀이 자라지 않는 산에서 작은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계곡물 옆에 초지가 있고 산양과 낙타가 있는 풍경이 매우 아름다웠다. 아프가니스탄 남부는 지금도 전쟁 중이다. 전운 속에 통과한 카이볼 고개 우리는 카불을 출발해 미군과 유엔군, 아프간군의 기지를 줄곧 지나갔다. 모든 곳에서 경비가 삼엄했다. 입구는 병사가 지키고 있었고 도중에 완전무장한 ‘험머(미군차량)’가 때때로 길을 지나갔고 무장헬기가 공중을 떠다니고 있었다. 파키스탄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힌두쿠스 산맥의 중요한 고개인 유명한 카이볼 고개를 통과해야 한다. 지형은 매우 험하며 오사마 빈 라덴이 이곳에 숨어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험난한 산길을 지나 무사히 입국수속을 마치고 파키스탄 땅을 밟으니 이국적인 우유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바이사와, 간다라 불교의 발원지 서기 2세기, 가니스가왕은 바이사와에 도읍을 건설하고 불상석조를 위주로 한 간다라불교문화를 창조했다. 왕조의 변천에 따라 인도와 페르시아, 그리스 문화가 바이사와를 휩쓸고 지나가며 이곳을 동서양 문화가 융합된 지역으로 만들었다. 현장법사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바이사와를 거쳐 파키스탄으로 들어갔으며 대당서역기에서 바이사와를 ‘꽃과 열매가 무성한천국의 나라’로 묘사했다. 바이사와는 산스크리트어로 ‘백가지 꽃의 도시’라는 뜻. 바이사와 현지의 주요민족인 파탄족은 세계에서 가장 호전적인 민족의 하나로 모두들 몸매가 늠름하다. 몇 세기 동안 수많은 파탄족은 그들의 명예로운 규칙을 지켜왔다. 충성과 용감함, 보복을 강조하는 것이다. 파탄족이 거주하는 부락지역은 파키스탄 국법이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으로 파탄족의 부락규칙만이 통용된다. 하지만 바이사와 박물관에는 일대의 사원에서 수집한 불상이 빼곡히 진열돼 있다. 색은 선명하고 표정은 비감하거나 평안하다. 바이사와에서 동북쪽으로 40km 떨어진 지역은 고도유적지 ‘차사다’로 현장법사가 지나간 곳이지만 지금은 거대한 묘지로 변해 있다. 대신 인근 탁트이바이에는 사원 유적이 남아 있어, 1980년 최대의 간다라 불교유적지로 세계문화유산에 등록됐다. 천년고도 탁시라에서 이슬라마바드까지 바이사와에서 이슬라마바드까지는 182km인데 차량대열이 이 길을 지나는 데 아홉시간이 걸렸다. 불교 유적지가 너무 많아 차마 빨리 지나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이사와를 출발한 차량대열은 카불강과 인도강이 합해지는 지점에 도착했다. 이곳은 실크로드에서도 위험하기로 유명한 지역의 하나이다. 현장법사는 당시 이곳 부근에서 출발해 인도강을 건넜다. 탁시라 유적지는 이슬라마바드에서 서북쪽으로 30여km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으며 2500년전에 건설된 고도이다. 견고하면서도 크고 높은 성곽과 정교한 불탑, 금옥이 휘황찬란한 사원과 사실적인 인물조각이 여기저기 세워져 있어 이 도시의 화려한 과거를 짐작할 수 있다. 현장법사는 탁시라에서 2년을 거주했고 설법을 강연하여 현지인의 환영을 받았다. 지금도 현장법사와 관련해 신기한 전설들이 전해지고 있다. 특히 졸리안 불교유적지는 현장법사가 오래 설법한 곳으로 당시 남아시아 불교도들까지 이곳을 찾아왔다고 한다. 유적지에 들어서니 긴 수염을 기른 백발의 노인이 일행을 인도해 수많은 스님들의 좌대를 지나 비교적 큰 좌대 앞에 도착해 완벽하게 보존된 조각상을 가리켰다. 그가 바로 현장법사였다. 80년대생 중국젊은이의 소비 2억명이 소비시장 주도 개성적 소비패턴 … 유행에도 민감 몇 년 안에 중국 소비시장의 주인공으로 ‘80년대생’이 떠오르게 될 전망이다. 그들은 개성, 자아, 유행을 추구하며, 소비를 먼저 생각하는 세대다. 이러한 소비층을 맞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편집자 현재 중국의 80년대생은 2억명 정도. 이들은 시장경제, 글로벌리제이션(세계화), 인터넷 보급 등을 통해 소비관념이 형성됐다. 또 어려운 시기를 거쳐 자녀들에게 풍요로운 물질을 선사한 부모세대와는 다른 사회구조의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PSP를 가장 갖고 싶어 하고, 손에는 최신형 휴대폰을 주머니엔 ipod MP3와 500만화소의 디지털카메라를 휴대하며, IBM노트북으로 무선 2007-06-06
- 미국, 엘리트이혼 줄고 저학력이혼 증가 미국의 상류사회 엘리트 계층에서 이혼율은 낮아지고 있는 반면 생활수준과 학력이 낮은 계층의 이혼율은 높아지고 있다. 지난달 24일 ‘이코노미스트’ 신문은 최근 ‘프린스턴 리뷰’지에 발표된 보고서를 인용해 미국젊은이들의 결혼과 양육에 대한 태도를 보도했다. 고학력자와 저학력자들 사이에서 서로 다른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요지다. 이 보도에 따르면 대학을 졸업한 여성은 미혼모 비율이 4%에 불과하며, 결혼 후 이혼율도 급격하게 낮아지고 있다. 1975~1979년에 결혼한 대졸학력자 가운데 10년 이내에 이혼한 사람의 비율은 29%였다. 그러나 1990~1994년에는 16.5%로 줄었다. 반면 1975~1979년에 결혼한 고교중퇴 이하 학력자는 이혼비율이 38%였으나, 1990~1994년에는 46%로 크게 늘어났다. 고졸학력자도 같은 비교구간에서 35%에서 38%로 약간 상승했다. 고등학교 중퇴 이하의 학력자 중 미혼모 비율은 15%였고, 흑인인 경우는 67%였다. 맨하탄 연구소의 케이 히모위츠는 ‘미국의 결혼과 계급’이란 책에서 ‘결혼차이’가 미국의 불평등을 조장하는 주요원인이라고 지적했다. 친부모와 같이 사는 중산층 아이들은 성공적인 사회화 과정을 거침으로써 학교성적도 우수하고 좋은 직업을 갖게 된다. 반면, 한쪽 부모하고만 사는 경우 학교성적이 낮고 부모의 전철을 밟게 되는 경우도 많다는 것이다. 연소득 7만5000달러이상인 가정의 어린이는 92%, 연소득 1만5000달러 이하인 가정의 어린이는 20%만 친부모와 살고 있다. 물론 양쪽 부모 모두가 돈을 벌기 때문에 편부모와 살고 있는 경우보다 연소득이 높다고 해석될 수 있다. 룻거스 대학 내셔날 메리지 프로젝트의 데보라 데포 화이트헤드와 데이비드 폽노스는 “결혼은 부를 축적하는 제도이다. 독신자보다 기혼자들이 더 많은 재산을 소유한다”고 설명했다. 기혼자들은 부부가 모두 경제활동을 하며, 미래계획을 세우고 인간관계를 원활하게 하는 기술도 함께 습득한다. 경제적으로 더 많은 부를 쌓을 재능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결혼은 행동규범에도 영향을 미친다. 하이파 대학의 아브너 아이투브와 어번 연구소의 로버트 러맨은 “미국 기혼남성은 일하는 시간이 길어지고 가족과 사회에 대한 책임감이 강해지며 술과 마약에 중독되는 일도 미혼자들에 비해 적다”고 말했다. 이들의 조사결과 독신자에 비해 기혼자들의 봉급은 최고 40% 이상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최진성 리포터 jinny513@hotmail.com 2007-06-07
- [6월항쟁, 그 후 20년] 4054세대에게 묻는다(초고) 민주화의 첫출발이 된 87년 6월항쟁은 당시 청년층에게 강렬한 기억이다. 표적집단심층좌담(FGD)에 참여한 6명의 수도권 40대 화이트칼라들은 당시 처한 상황은 제각각이었지만 20년이 지났어도그 느낌은 기억하고 있었다. 87년 얘기를 꺼내자 "전두환 대통령이 ''본인은..''하면서 TV에 생중계됐어요" "그거 끝나자 전국이 벌떼처럼 일어났었죠" "시청이 꽉 찼었죠" "서울역 앞에 엄청난 군중들" 등 봇물터지듯 말이 이어졌다. 이 세대들이 서로간의 동질감을 확인하게 하는 일종의 ''정신적 문신''으로 느껴졌다. FGD 참석자들은 20년 전인 87년 6월을 다양한 입장과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지고 맞이했다. 대학생, 군인, 제대후 직장을 가지기 전, 또는 직장인의 입장에서 6월을 맞이했다. 당시 청년층의 스펙트럼이 그대로 드러났다. 이들 중 일부는 시위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지만 군부독재가 종식되어야 한다는 생각만 한 경우도 있었다. 교육직공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박기환씨는 시위에 참여는 안했지만 최루탄엔 맞아봤다. 박씨는 "청계천 그쪽에 술 취해 있는 데모 피한다고 골목으로 가다가 뒷머리를 딱 (최루탄을) 쐈다. 지금도 흉터가 있다"고 말했다. 박씨는 당시도 공무원 신분이어서 참여는 안 했지만 "정권이 바뀌어야 된다는 생각을 간절히 했다"고 말했다. 당시 역시 직장인이었던 박준영씨는 "기성세대가 못하는 걸 젊은 세대가 해준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반대로 정경식씨는 당시 군대에서 진압군 훈련을 받으면서 시위대 안에 북한의 불순분자가 섞여 있다는 말을 그대로 믿고 있었던 경우다. 정씨는 "빨갱이가 있다. 얘네들을 색출해내야 된다. 그런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중소기업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장선중씨는 불어나는 시위대를 보면서 시위대에 참여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닌지 혼란스러운 상태로 그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군대 막 제대하고 직장생활하고 있었는데 저걸(데모) 해야 되나, 가만히 있는 게 옳은 거냐 참 개인적으로 방황한 그런 시기를 보낸 것 같다"고 회상했다. 처한 상황은 제각각이었지만 6월 항쟁이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줬다는 데에는 별 이견이 없었다. 자유, 인권, 민주화 등의 면에서 사회적으로 큰 진전을 이룰 수 있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었다. "그때는 이 나라 앞길이 어떻게 되려는가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되돌아보면 그 항쟁을 일으켜야 지금 이렇게 편한 사회로 될 수 있었나 참 놀랍다"(박기환) 그러나 역시 먹고 사는 문제의 최일선에 있는 이들로서는 민주화 등이 만개한 것에 비해 경제 관련해서는 기대에 미흡한 부분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박준영씨는 "6.29 이후에 노조 데모가 엄청났다"면서 "물론 자기 주장을 해야 되는 건 맞는데 아직 우리가 허리띠를 더 졸라매야 되는 상황인데 … 너무 빠른 것 아니냐"고 말했다. ''속도조절''이 안 된 것 아니냐는 비판이다. 최민영씨는 "민주화 쪽으로 많이 발전을 했는데 또 이쪽(경제)으로는 영 아니다 하시는 분들도 있다. 그게 비슷비슷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들이 경제 문제에 민감하게 된 것은 현재의 어려움도 있지만 대부분 첫 아이를 막 낳았거나 이제 본격적인 결혼생활을 하려는 때 겪은 97년 IMF외환위기의 경험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큰애가 97년 12월생인데 애 분유는 먹여야 될 것 아니냐. 그때 마트 가서 분유 이만큼 산 기억이 난다"(배성규) "직장이 과연 살아남느냐. 서바이벌 게임이라고까지 얘기하면서 직장을 다녔다"(박준영) 등의 발언은 이들이 그 때 얼마나 절박했는지를 보여준다. 배성규씨는 "정신 인권 등 정신이고.. IMF는 우리에게 닥치는 의식주"라고 정리했다. 20년 전에 민주화를 이뤄낸 이들 세대는 10년 전엔 우리 경제가 세계경제에 편입되는 시점의 고통을 공유했고, 지금은 두 가지 공통된 경험을 갖고서 그 다음은 뭐가 돼야 하느냐를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형선 기자 egoh@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6-07
- 국제결혼이주여성 정보화지수 높인다 서울지역 5개 자치구가 국제결혼을 통해 국내에 정착한 이주여성 가정을 위한 문화·정보화 지원에 나선다. 서울여성플라자는 관악 구로 금천 동작 영등포구에 거주하는 다문화가정을 대상으로 ‘2007 이주여성지원 협력프로젝트’를 시행한다. 국제결혼이 급증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이주여성들이 지역사회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과정이다. 올 연말까지 동작구 대방동 서울여성플라자 강의실과 별난놀이터 등에서 문화공감대 형성 프로그램과 이주여성 대상 정보화 교육, 이민자 가정 자녀교육을 진행한다.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선보이는 각종 공연에 여성 이민자와 그 가족을 초청해 문화적 감수성을 높이는 동시에 한국문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과정이 그중 하나다. 4주에 걸친 윈도우 워드 인터넷 등 정보화 기초교육을 통해서는 고도로 발달된 국내 IT정보화 부문에서 느끼는 소외감을 해소하는 한편 실질적인 정보활용능력을 강화한다. 또 교육연극연구회(ATA), 한글교실 자원봉사자와 함께 학령기 자녀를 대상으로 한글 문화예술교육 생활교육을 지원한다. 통계청에서 발표한 2006년 혼인통계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전체 결혼한 8쌍 중 1쌍이 국제결혼을 했다. 결혼을 통해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여성 결혼이민자는 8만2828명이다. 국제결혼 가정 자녀는 1만3000여 명이다. 김진명 기자 jmkim@naeil.com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2007-06-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