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람' 검색결과 총 825개의 기사가 있습니다.
- 한가람마을 신라아파트를 찾아서 안양시청 뒤편에 위치한 부림동 한가람 신라아파트는 15∼18평형이 전체 1068세대의 70%가량을 차지하는 소형 위주의 아파트단지다.92년 8월 임대아파트로 입주한 후 98년 분양으로 전환되었다. 24평형이 제일 넓은 평수인 서민아파트이지만 만만히(?) 보다간 큰코다치기 십상이다.정보화시대에 걸맞은 아파트홈페이지(www.silra.net)를 지난해 8월 개설했고, 다른 어느 아파트에서도 볼 수 없는 월간소식지 ‘가람’을 14회째 발행하고 있다. ‘가람’에는 월별 관리비부과내역은 물론, 대표회의 회의록, 공지사항 등 필요한 정보가 가득하다.신라아파트의 홈페이지에는 아파트소개부터 관리실, 동대표회의, 각종단체, 각종 은행입금내역, 관리비부과내역, 공지사항, 주민게시판, 물물교환에 이르기까지 아파트에 관한 모든 정보가 제공되고 있다.게시판에 올라있는 활발한 의견들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다.406동에 거주한다는 손명석씨는 “눈을 치울 수 있는 도구를 각 동마다 비치해준다면 운동 삼아 치우겠다”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웬만한 실력으로는 어림없을 것 같은 이 아파트 홈페이지는 입주자대표회의 총무를 맡고 있는 김치호(403동 거주)씨의 작품.컴퓨터 관련 일을 하고 있는 김씨가 제작한 홈페이지를 매일 점검 관리하는 일은 권오종(39)소장의 몫이다. 관리소 한쪽 소장집무실에는 컴퓨터가 하루종일 켜져 있다. 4곳의 인터넷 전용선 업체들로부터 기증 받아 무료로 사용중이다. 인터넷 가입시 입주민들 역시 어느 업체나 마음대로 선택할 수가 있다.권 소장은 87년도 아파트 관리주임을 시작으로 95년 소장으로 일하기까지 이 일에 잔뼈가 굵은 사람이다. 이 아파트는 입주한 이후 99년 초까지는 위탁관리를 해왔다. 위탁관리시 불거진 각종 문제점을 인식한 주민들은 비상대책위원회까지 구성하여 개혁을 하게 됐다. 결국 자치관리를 하자는 데 의견이 모아졌다. 몇 개월 동안 권소장을 눈여겨본 아파트입주자대표회의(회장 김영도)에서 투명한 관리를 위해 권소장을 다시 받아들였다. 권소장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입주자대표회의 구성원들과 합심하여 의욕적으로 개혁해 나갔고 관리비 절감 및 주민편의를 도모하는데 최선을 다했다.이 아파트에서는 앞으로 홈페이지와 소식지를 통한 광고수입도 예상하고 있다. 따라서 이의 투명한 관리를 위해 아파트관리규정 외에 ‘소식지 및 광고방송시설 운영규정’까지 별도 제정해 두고 있다.관에서 주도하던 기존의 새마을부녀회 조직도 지난해 자진 사퇴한 후 입주민들을 위한 순수한 자체부녀회가 새롭게 발족되었다. 부녀회가 관리하던 각종 수익금을 아파트관리외 계정에 입금토록 하여 투명하게 관리하고 있다. 관리비외 수입지출현황을 홈페이지와 소식지를 통해 매월 공개하고 있다.“평촌에서 최고의 아파트를 만드는 게 목표”라는 권소장의 이야기처럼 이런 노력의 결과로 「2000안양시 모범우수단지」로 선정되는 영광도 안았다.신라아파트에 처음 이사온 세대에는 ‘편리한 주민생활을 위한 안내문’이 배부된다. 새로 이사와서 허둥대지 않게끔 관리비 납부방법, 주차문제, 쓰레기 문제 등 입주민들이 꼭 알아두어야 할 사항이 빼곡이 적혀있다. 심지어 동사무소, 파출소 등 유관기관 전화번호까지 게재되어 있다.관리비 절감을 위한 한가지 방법으로 경비를 줄이다보니 오후 7시부터 아침 6시까지는 아파트 입구에 차량차단기가 내려진다. 따라서 관리소에 차량등록을 한 사람에게 지급되는 리모콘을 이용하여 차량소지자가 직접 차단기를 조작 통행해야 한다. 외부차량은 통행할 수 없는 통제조치인 것이다.모든 일을 입주민의 입장에서 내집 일처럼 생각하고 실천하는 관리소 직원들, 공정하고 투명한 관리를 위해 애쓰는 소장, 아파트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주민대표들. 이들의 노력이 합해져 한가람 신라아파트는 평촌 제일 가는 살기 좋은 곳으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관리사무소☏ 381-1667)김종옥 리포터 2001-02-08
- <다시보는 우리 문화유산:6. 의상대사와 화엄10찰>왜 절이 도시를 떠나 산으로 들어갔을까 “둥! 둥! 둥!” 어둠이 깔린 지리산 화엄사, 장쾌한 법고(法鼓) 소리가 멀리 노고단까지 울려퍼진다. 법고의식이 끝나면 범종 타종이 이어진다. 범종 소리는 범종각 가까이 서서 눈을 감고 들어보아야 한다. 공기를 매개로 전달되는 간접 진동이 이보다 더 클 수 있을까 . 깜짝 놀랄 만큼 크고 장중한 범종 소리는 가슴속 깊이 파고들어 모든 고민과 번뇌를 떨쳐버린다. 원융회통(圓融會通)하는 부처의 가르침 ‘화엄사’는 통일신라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다. 화엄사에는 8세기경으로 짐작되는 장대한 ‘석등’(국보 12호)과 그 앞의 ‘돌층계’, 각황전 뒤의 ‘자연석축’, ‘4사자3층석탑’(국보 35호) 등 창건 당시의 건축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다. 또 일주문에서 대웅전까지 두 번의 태극을 이루며 올라가는 진입로가 부석사의 꺾어진 진입공간을 연상하게 한다.화엄사의 건축미학은 각황전으로 올라가는 돌층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서탑 옆의 가파른 돌층계를 밟고 조심조심 올라서면 거대한 석등이 조금씩 높아지면서 눈에 들어온다. 석등이 눈에 꽉 차면 석등 뒤로 각황전에 앉아 계신 부처님이 나타난다. 만일 깜깜한 밤중에 석등에 켜진 등불을 보고 이 층계를 오르다 불이 환하게 밝혀진 각황전을 본다고 생각해보라. 부처님을 만나면서 이 보다 더 큰 경외심을 느낄 수 있는 건축공간이 또 있을까. 지금까지 전해지고 있는 석등 중에서 제일 크다는 각황전 앞 석등은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국보 제12호이다. 각황전 뒤에는 부석사와 비슷한 시기에 축조된 석축이 그대로 남아 있다. 부처님께 삼배를 하고 각황전 뒤의 백팔계단을 오르면 ‘4사자3층석탑’(四獅子三層石塔)과 연기조사가 어머니에게 차 공양을 올리는 조각상이 나타난다. 4마리의 사자가 석탑을 떠받치고 있는 가운데 온화한 표정의 어머니가 서 있고, 그 아래 사바세계의 인연을 끊고 출가한 수행자가 한잔의 차를 공양하고 있다. 문자를 통해 어렴풋이 인식하고 있던 추상(抽象)의 화엄이 불심(佛心)이 넘쳐흐르는 구체(具體)의 화엄으로 펼쳐지는 순간이다. 유교의 효(孝)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지배 이데올로기에서 시작되었다면, 화엄의 효는 이렇듯 우주만물의 아름다운 인연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토착적인 산악숭배사상과 결합 ‘불국사’와 ‘석굴암’이 수도 서라벌에서 통일신라의 독창적 예술세계를 빚어내고 있을 무렵, 전국각지의 이름난 산에는 다양한 모습의 사찰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왜 절이 도시를 떠나 산으로 들어갔을까. 여기에는 큰산을 신령스러운 곳으로 생각하는 우리 민족의 토착적인 산악숭배사상과 여러가지 종교적 이념이 작용하고 있었다.자장이 창건한 ‘통도사’, 진표가 창건을 주도한 ‘금산사’와 ‘법주사’는 중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승려들이 귀국할 때 가져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옷가지 등을 신령한 산에 모시고 절을 지은 예이다. 의상이 창건한 ‘낙산사’는 관세음보살을 친견한 곳에 절을 세운 경우인데 이는 당시 관음신앙이 유행했음을 잘 보여준다. 특히 의상이 중국에서 가져온 화엄사상의 성행은 사찰이 산간에 확산된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화엄 사찰은 그 배치나 건물구성이 도시형(평지형) 사찰과는 완전히 달랐다. 산세에 따라 건물을 배치함으로써 회랑(긴 복도)으로 둘러싸인 쌍탑식 가람배치에서 벗어난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삼국통일기에 당나라 유학한 의상의상은 백제가 멸망한 후인 661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10년 전 의상은 현장법사의 귀국 소식을 듣고 원효와 함께 중국으로 떠났으나 고구려 순라군에게 잡혀 실패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당나라 사신이 돌아가는 배를 탔다. 그런데 중국행(行)에 성공한 의상은 현장법사가 아니라 지엄(智儼)을 찾았다. 지엄은 중국 화엄종의 제2조(祖)로 화엄사상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당시 중국은 수나라의 강권에 의한 통일이 무너지고 당나라의 이념통치가 확립되던 때였다. 광활한 국토에 다양한 민족, 여러가지 신앙이 뒤엉킨 통일중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강력한 이념적 통일이 필요했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일어나는 법이 없다.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 … 화엄의 이런 가르침은 서로 대립하고 항쟁을 거듭하는 국가와 사회를 정화하고, 사람들의 대립도 지양시켜 마음을 통일하게 한다. 이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같은 전제적인 통일국가의 정신적 뒷받침이 되었다. ― 이기영.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의상은 명실상부한 지엄의 수제자였다. 그는 중국 화엄학의 3대조로 일컬어지는 법장 ― 측천무후를 도와 당나라의 이념체계를 세운 승려 ― 의 선배였으며 38세에서 44세에 이르는 중요한 시기 8년 동안 지엄으로부터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배웠다. 그 사이 삼국이 통일되고(668) 당과 통일신라의 7년 전쟁이 예고되고 있었다. 이 전쟁이 터지기 직전, 의상은 서둘러 신라로 돌아온다. 《삼국유사》는 “의상이 당나라 고종의 신라 침략을 본국에 알리기 위해 서둘러 귀국했다”고 기록한다. 안동지방에만 있는 중국식 전탑 영주 부석사는 676년 의상이 창건한 절이다. 의상은 귀국 후 양양 낙산사를 비롯, 전국의 산천을 두루 거쳐 이곳 부석사로 온다. 그는 당시 신라의 문무왕과 직접 교류할 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가 왜 서라벌 장안이 아닌 태백산 쪽 변방에 절을 짓고 화엄의 가르침을 펼쳐나갔을까. “그때 신라의 기득권들은 의상의 서라벌 입성을 반대했다. 그러자 의상은 영남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태백산 줄기 봉황산 기슭에 ‘해동화엄종찰’ 부석사를 창건했다.” 안동대 국학부 이효걸 교수의 말이다. 이 교수는 “결국 그는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화엄사상의 새로운 문화지대를 만들어 경주로 입성하게 된다. 이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안동지방에만 집중적으로 세워진 중국식 전탑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의상은 비록 유학파였지만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던 원효의 정토사상을 토대로 화엄사상을 펼쳐나갔다. 화엄사상은 우주론적 인식을 필요로 한다. 대중들이 인식하기엔 무척 어려운 개념이다. 그렇지만 ‘이 땅이 곧 정토’라는 원효의 가르침은 대중적인 이해가 빠르다. 의상은 원효의 정토사상을 통해 대중들을 화엄의 세계로 이끌어낸 위대한 스승이었던 것이다.부석사는 이런 그의 사상적 특징 ― 중국식 화엄종이 아닌 우리식 화엄종 ― 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찰이다. 부석사 무량수전 아미타여래(무량수불)는 좌우에 아무런 협시보살 없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서쪽에 앉아 있는 아미타여래에게 경배하는 사람들은 자연히 그 뒤에 있는 소백산 비로봉을 향해 절을 하게 된다. 비로봉은 곧 비로자나여래를 뜻한다. 이는 아미타여래와 비로자나여래를 동일시했던 의상의 신라식 화엄사상을 잘 보여준다. 글·사진 남준기 기자 jknam@naeil.com 2000-12-29
- 2000 가람 시조문학상 시상식 열려 2000 가람 시조문학상 시상식이 28일 익산시 국민생활관에서 조한용 익산시장 등 각급 기관단체장과 시조인 및 시민 등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이날 국민생활관 소극장을 가득 메운 각계각층의 축하 속에서 치러진 시상식에서 올해 영예의 수상자로 선정된 남주 박옥금(朴玉今. 73세)시인에게는 상패와 함께 500만원의 상금이 수여됐다. 경상북도 청도 출생인 南州 박옥금 시인은 영남대학 문과 예과를 졸업한 후 안동 사범고 국어교사와 한국시조시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 여성문학인회 이사를 맡고 있다. 박시인은 그동안 '塔'과 '한 生 피는 뜻은' '저하늘 끝에 살아도' '지리산을 넘으며' 등의 시조집을 펴냈으며 서정성 짙은 창작세계를 널리 인정받아 한국 시조문학상(1986) 丁芸 시조문학상(1987), 노산문학상(1991)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이날 시상식에서 조한용 시장은 "박옥금 시인의 시에는 가람 선생의 시조정신이라 할 수 있는 서정성과 뛰어난 예술성이 잘 나타나 있다"며 "영예의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고 말했다. 또한 조시장은 "앞으로 가람 문학상이 참신한 시조시인의 육성과 시조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명망있는 상이 되도록 적극 육성해 나갈 방침"이라고 말했다. 한편 익산시는 현대시조의 개척자인 가람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지난 1979년 제정된 가람 시조문학상이 재정난으로 인해 폐지될 위기에 처함에 따라 올해부터 가람 시조문학상을 주관하고 있다. 2000-12-28
- <다시보는 우리 문화유산:8.고려의 교종사찰들(양주 회암사지와 원주 법천사지)>가장 화려했던, 그러나 완벽한 폐허로 남은 절터들 의정부에서 양주군 주내를 거쳐 동두천으로 올라가는 3번국도는 지금은 남북분단으로 끊어졌지만, 원래 서울에서 함경도까지 이어진 ‘눈물 많은’ 길이다. 왕자의 난으로 노한 태조 이성계가 한양을 떠나 함흥에 있을 때 함흥차사들은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이 길을 눈물로 떠났고, 이항복도 ‘철령 높은 재에 쉬어 넘난 저 구름아’를 읊으며 이 길로 귀양을 갔다. 천보산 아래 자리한 거대한 절터 의정부에서 주내를 지나 덕정에서 오른쪽으로 15리쯤 들어가면 천보산 회암사지(檜巖寺址)가 자리잡고 있다. 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는 회암사 뒤로는 천보산 줄기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앞으로는 넓은 평원지대가 펼쳐진다. 서남쪽 건너편으로는 백두대간 철령에서 북한산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漢北正脈) 불국산이 보인다. 북쪽은 높고 남쪽은 낮은 지형을 9개의 석축으로 쌓아 층층이 불단을 배치한 회암사지는 동서길이 약 158m, 남북길이 약 230m에 이르며, 지금까지 확인된 주춧돌 수만 532개가 되는 엄청난 규모의 유적지이다. 남북 중심축선은 천랑(지붕이 있는 복도)과 돌층계로 연결되는데, 각 단마다 건물 터가 층층이 나타난다. 절터 중심부 외곽으로는 성벽을 방불케 하는 높은 석축을 쌓았다. 석축의 높이는 지형에 따라 6~7m에 이르며, 길이는 동쪽 149m, 서쪽 165m, 북쪽 103m나 된다. 이렇게 장엄한 석축에 둘러싸인 회암사는 울창한 수림과 어울려 마치 거대한 석굴(石窟) 속의 사원처럼 장관을 이루었을 것이다. 회암사 창건에 대해서는 1328년(고려 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指空:인도 승려)이 인도 서축(西竺)의 나란타사와 산수의 형상이 같은 천보산(天寶山) 서남쪽 기슭에 자리잡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고려 우왕 2년(1376) 나옹(懶翁)과 그 문도 각전(覺田) 등이 불당 262칸을 중창하였으며, 고려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이 절의 승려 수는 3000여명에 이르렀다. 고려를 대표하는 양주 회암사 유적 조선초 태조 이성계는 자신의 스승이자 나옹의 제자였던 자초(自超) 무학대사(無學大師)를 회암사에 머물게 하고 큰 일이 있을 때마다 신하를 보내 참례하도록 했고, 말년에는 아예 회암사로 들어와 수도생활을 했다. 왕자의 난 이후 함흥에 머물던 태조 이성계는 태종과 신하들의 청에 못 이겨 귀경길에 올랐으나, 이곳 양주 회암사까지 와서 주저앉아버렸다. 태종은 당시 국가최고 기관인 의정부(議政府)를 지금의 의정부시로 옮겨 태조와 국사를 의논했으니, ‘의정부’란 지명도 이때 생겼다고 한다. 회암사는 조선초까지만 해도 나라 안에서 가장 큰 절이었다. 세종 6년(1424)의 기록을 보면 이 절에는 250여명의 승려가 있고, 경내가 1만여평에 이르렀다고 한다.성종 3년(1472) 정희왕후가 다시 중창하였고, 명종 때 문정왕후의 불교중흥정책으로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으나, 왕후가 죽고 유신(儒臣)들에 의해 다시 억불정책이 펼쳐지게 되니, 명종 20년(1565) 사월초파일에 승 보우(普雨)가 잡혀가고 절은 유생들에 의해 불태워져 폐허가 되고 말았다. 회암사의 건물들은 지금 남아 있지 않지만 지금까지의 발굴 결과 고려 말 목은 이색이 기록한 산 회암사수조기>의 가람배치와 거의 일치하고 있으며, 경주 불국사 같은 회랑식 배치나 중정(中庭)식 가람배치와는 다른 특이한 형태를 보여준다. 회암사지 뒤로는 1821(순조 21) 경기지방의 승려들이 지공·나옹·무학 세 스님의 부도와 비를 중수하면서 지은 작은 규모의 사찰이 회암사의 옛 이름을 계승하고 있다. 화려하고 장엄했던 고려의 다례의식 특히 이곳 회암사지에서 중요한 것은 손님을 접대하던 공간으로 동객실 서객실을 두고, ‘향적전(香積殿)’이라는 이름의 다례(茶禮) 공간을 마련했다는 점이다. 향적전 안에는 욕조로 추정되는 수조(돌로 만든 욕조)가 있고, 뒷마당에는 우물터가, 우물터 양쪽으로 찻물을 끓이던 다관받침석 2개가 줄바르게 놓여 있다. 고려 귀족층의 다례의식은 보통 2~3시간 정도가 걸렸다고 한다. 지금은 황량한 유구들만 남아 있지만, 회암사 터에서 당시의 다례의식을 상상해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고려의 귀족들은 말을 타고 이곳으로 왔을 것이다. 하인들이 절 입구 층계 오른쪽에 있는 마방에 말을 매고 쉬는 동안, 공양주는 중앙 통로로 걸어 올라간다. 큰 공양주가 왔으니 큰스님이 천랑을 따라 걸어내려와 손님을 맞고, 향적전으로 인도해서 우선 따뜻한 물로 땀을 씻게 했을 것이다. 돌 욕조 안에는 뜨겁게 달군 돌덩이를 넣어 물을 따뜻하게 데웠으리라. 손님이 목욕을 하는 동안 향적전 뒤편의 다관받침석 위에서는 찻물이 끓기 시작한다. 목욕을 마치고 새옷을 갈아입은 공양주에게 스님이 향기로운 차를 들고 들어온다 …. 회암사 다례 공간은 크고 화려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교종 말기의 ‘장엄미학’을 대표하는 차 문화 유적지이다. 지난 95년 이 유적을 처음 학계에 보고한 명지대 건축학과 김홍식 교수는 “교종의 장엄미학은 후대로 갈수록 작고 자연 그대로의 것을 아름답게 여기는 선종의 ‘극미학’으로 바뀌게 된다”고 설명한다. 경복궁 안에 있는 지광국사 현묘탑 강원도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자리잡은 법천사지(法泉寺址)도 고려 귀족사회의 건축미학을 잘 보여주는 곳이다. 법천사는 남한강과 원주 섬강이 만나는 흥원창 옆에 자리잡고 있다. 임진왜란 때 화재로 전소되기 전까지 1000여명의 승려가 있었으며, 아침 저녁으로 쌀 씻은 물이 남한강변까지 흘렀다고 한다. 지광 국사가 유식학을 드높인 이곳에는 현재 당간지주와 비석만이 남아 있다. 지광국사의 현묘탑은 일제강점기 때 총독부로 옮겨져 지금은 경북궁 뒤뜰, 국립중앙박물관 북쪽에 서 있는데, 화려하고 정교한 조각들이 고려 귀족들의 화려하고 장엄한 미의식을 그대로 대변해준다. 현재 법천사지에 남아 있는 (국보 제59호)도 섬세하고 정교한 기법의 용 문양이 단연 돋보이는 유적이다. 이 석비에는 ‘동다(東茶)’ ‘제호’ 등 ‘차(茶)’와 관련된 글귀가 무려 6군데나 나와 많은 다인들이 즐겨 찾는다. 이 비문의 마지막 구절은 이렇게 전한다. 1067년 10월 23일 편안히 오른쪽으로 누워 잠이 들었다. 이날 밤에 이슬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국사께서 제자들에게 “바깥 날씨가 어떤가”하고 물었다. 제자들이 “이슬비가 내리고 있습니다”라고 하자 곧 입적하였다. 폐허가 된 법천사지 안에는 이 밖에도 당시 건축물에 쓰였던 각종 석물들이 남아 있다. 이들 석물에는 다른 건축물에서는 비슷한 예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특이하고 화려한 조각들이 아로새겨져 있다. 연꽃문양이 아름답게 장식된 주춧돌, 하트 모양의 장식이 음각된 용도불명의 석물 … 자세히 살펴보면 건물 기단석에까지 일정한 형태의 조각이 새겨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남아 있지 않지만, 이런 석물들을 기초로 사용한 건축물이 과연 얼마나 화려하고 장엄했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글·사진 남준기 기자 jknam@naeil.com 2001-01-19
- 가람중학교 3학년4반 오성탁 담임교사<365호/교육> '벚꽃처럼 활짝 웃자'학업 외에 건전한 놀이문화와 다양함을 체험해야할 중학교 시절. 현실은 비 평준화 지역의 고교 입시에 가로막혀 고양시의 중학생들은 학교에서 학원으로 이어지는 숨막히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 중에서 중학교 3학년생들의 일년은 학업 외에는 어떤 즐거움도 허락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가람중학교 오성탁 교사가 이끄는 3학년4반 학생들은 비교적 활기찬 일년을 보내고 한 명의 낙오자 없이 무사히 입시를 끝냈다. 입시 준비외에 틈틈이 색다른 경험을 심어주고 교실을 그들이 맘놓고 숨쉴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준 오성탁 교사. 과학 교사이기도 한 그는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어느 날 자신의 수업시간을 핑계삼아 왠지 우울해있는 학생들을 이끌고 뒷동산에 올라 아이들이 맑은 감성을 잃지 않도록 세상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줄 아는 교사다.또한 학기초에는 학급의 주인은 학생들 자신임을 일깨워주며 반장 부반장 선출시에도 선관위를 구성하고 선거공고를 거쳐 입후보등록과 선거연설 등 모양새를 제대로 갖춘 직접선거를 실시하여 민주주의 훈련을 쌓아주었다. 자유와 책임을 동시에 부여해주며 자신들을 이해해주고 모든 결정을 대부분 학생들에게 맡기는 담임교사가 있기에 교내 체육대회 때에는 참가여부를 자발적으로 결정하여 10일간의 철저한 연습과 응원준비로 축구와 피구 등 많은 종목을 휩쓸고 종합우승과 응원 상을 차지한 3학년4반 학생들. 모든 일에 적극적인 3학년4반 학생들은 3학년들은 대부분 참여하지 않는 가람제의 학교행사에도 학생들이 직접 기획하여 준비한 '짱구의 아들 지용' 이라는 가장행렬로 많은 박수를 받았다.토요일 방과후에는 모둠별 요리행사를 하고 축구나 발야구 등의 단합대회로 중3의 특별한 신분을 망각하게 해주는 즐거움을 종종 제공해주는 오 교사. 1-2개월정도 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한 '용기게임'에 스스럼없이 당해주며 같이 웃어 줄 줄 아는 다정한 교사이기에 아이들은 급훈 '더불어 사는 다정한 사람이 되자'의 사람모습을 그에게서 직접 찾을 수 있었다.담임활동과 더불어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학교의 동아리 활동 지도. 식물 채집반과 방송반의 지도를 맡고 있는 그는 학생들과 수시로 야산에 올라 식물채집을 하며 6월 정기 전시회와 10월 가람제 행사를 무사히 마치고 3월에 있었던 특별방송과 가람제의 공개방송을 훌륭히 해 냈다. 매사에 근면 성실함이 돋보이는 오 교사에 대해 강정남 교감은 진취성과 더불어 특히 교직원들의 단결에 큰 몫을 담당한다며 그를 아낌없이 칭찬했다. 이번 겨울방학도 온전히 학급문집 만드는 일에 학생들과 기꺼이 바칠 각오가 돼있는 그는 1월 중순 학생들과 1박2일의 겨울바다 여행을 계획하며 벌써부터 가슴 뿌듯해 했다. 또한 그는 학교서열로 아이들 서열이 매겨지는 고교입시제도가 하루빨리 평준화되어 무한한 가능성이 펼쳐져 있는 아이들이 인생의 패배감을 일찍 겪지 않도록 중학교 교육의 정상화가 하루 바삐 오길 바랬다. 또한 다양한 교육활동을 하고자 하는 많은 교사들이 행정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지원체계가 부실한 현실에 많은 활동을 포기한다며 경직된 예산 편성에도 변화가 일기를 간절히 바랬다. 2001년엔 그의 바램이 모두 이루어져 활짝 웃는 학생들과 교사들의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으리라 소망해본다.전미정 리포터 flnari@naeil.com 2000-12-25
- 2000 가람 시조문학상 수상자 박옥금씨 선정 익산시가 올해 최초로 주관한 2000 가람 시조문학상 수상자로 원로 시조시인인 박옥금(여, 73세)씨가 선정됐다. 가람 시조문학상 심사위원회는 20일 창작경력 10년 이상의 시조시인 중 최근 3년간 우수한 작품을 발표했다고 인정하는 시조시인을 대상으로 엄정한 심사를 통해 박옥금씨를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수상자인 박옥금씨는 경상북도 청도 출생으로 영남대학 문과 예과를 졸업한 후 안동 사범고 국어교사와 한국 시조시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 여성문학인회 이사를 맡고 있다. 박 시인은 그동안 '塔'과 '한 生 피는 뜻은' '저하늘 끝에 살아도' '지리산을 넘으며' 등의 시조집을 펴낸 바 있으며, 서정성 짙은 창작 세계를 널리 인정받아 한국 시조문학상(1986), 丁芸 시조문학상(1987), 노산 문학상(1991)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이상철 심사위원장은 "올해 심사에서는 전통적 가락이 잘 살아있는 가람 선생의 시조정신을 감안했다"며 "박옥금씨의 시조에는 서정성이 잘 살아있고 시조양식의 형태 또는 가락이 넉넉하게 검출돼 뛰어난 예술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익산시는 현대시조의 개척자인 가람 선생의 뜻을 기리는 가람 시조문학상이 최근 재정난으로 인해 폐지될 위기에 처함에 따라 올해부터 가람 이병기 문학상을 주관, 참신한 시조시인의 육성에 적극 나서기로 한 바 있다. 2000 가람 시조문학상의 시상식은 가람 선생의 기일을 추모하여 오는 28일 익산시 국민생활관 소극장에서 열린다. 2000-12-20
- 2000 가람 시조문학상 수상자 박옥금씨 선정 익산시가 올해 최초로 주관한 2000 가람 시조문학상 수상자로 원로 시조시인인 박옥금(여, 73세)씨가 선정됐다. 가람 시조문학상 심사위원회는 20일 창작경력 10년 이상의 시조시인 중 최근 3년간 우수한 작품을 발표했다고 인정하는 시조시인을 대상으로 엄정한 심사를 통해 박옥금씨를 수상자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수상자인 박옥금씨는 경상북도 청도 출생으로 영남대학 문과 예과를 졸업한 후 안동 사범고 국어교사와 한국 시조시인협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한국 여성문학인회 이사를 맡고 있다. 박 시인은 그동안 '塔'과 '한 生 피는 뜻은' '저하늘 끝에 살아도' '지리산을 넘으며' 등의 시조집을 펴낸 바 있으며, 서정성 짙은 창작 세계를 널리 인정받아 한국 시조문학상(1986), 丁芸 시조문학상(1987), 노산 문학상(1991) 등을 수상한 바 있다. 이상철 심사위원장은 "올해 심사에서는 전통적 가락이 잘 살아있는 가람 선생의 시조정신을 감안했다"며 "박옥금씨의 시조에는 서정성이 잘 살아있고 시조양식의 형태 또는 가락이 넉넉하게 검출돼 뛰어난 예술성을 확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익산시는 현대시조의 개척자인 가람 선생의 뜻을 기리는 가람 시조문학상이 최근 재정난으로 인해 폐지될 위기에 처함에 따라 올해부터 가람 이병기 문학상을 주관, 참신한 시조시인의 육성에 적극 나서기로 한 바 있다. 익산 소문관 기자 mkso@naeil.com 2000-12-20
- 국내 첫 자연생태 인터넷방송국 개설 한국자연정보연구원(원장 노영대)이 최근 자연생태를 다루는 전문 인터넷방송국 메가람(megalam.co.kr)을 열고 방송을 시작했다. 지난 98년부터 자연생태 종합웹진으로 출범한 이 사이트는 그동안 축적한 방대한 양과 수준 높은 질을 멀티미디어화 추세에 맞춰 인터넷 방송을 통해 네티즌들에 공급할 계획이다. 특히 이 방송은 개국 특종으로 ‘30년만에 발견된 희귀식물 섬시호’와 ‘최초로 동영상에 담긴 노랑미치광이풀’을 다뤄 자연환경 네티즌들의 관심을 모았다. 또 최근 방송한 ‘세계 최초로 위성추적장치를 이용한 독수리 이동경로 추적’을 다뤄 환경 분야에 관심이 높은 이들의 인기를 얻었다.이 방송은 ‘금주의 동식물’ 코너에서 제1편으로 이땅에서 사라져가는 생명문화재에 천연기념물인 두루미와 법정보호종인 고추냉이를 소개했다. 최근 자연 다큐멘터리에 대한 사회의 관심이 높아지자 우리나라 최고 자연 다큐작가들의 작품을 감상할 수 있도록 했다.한국자연정보연구원은 전·현직 기자, 교수, 생태사진가, 다큐멘터리 작가, 환경운동가, 자유기고가 등이 공동 참여해 다양한 사업을 펼치고 있다. 2000-12-17
- 가람 이병기 문학상 익산시가 주관키로 익산시는 지역출신으로 우리나라 시조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가람 이병기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그동안 가람시조문학상위원회 및 ‘문학과 사상사’가 운영해오던 가람 이병기 문학상을 올해부터 시가 직접 주관, 운영키로 했다. 7일 익산시에 따르면 여산면 출신인 가람 이병기 선생은 현대시조의 개척 및 시조문학의 중흥에 크게 기여해왔으며 ‘문학과 사상사’ 등은 지난 1979년부터 가람 이병기 문학상을 제정, 시조시인들의 창작의욕을 고취하고 선생의 고결한 뜻을 기려왔다.그러나 그동안 시상을 주관해온 이화여자대학교 부설 가람시조문학상 위원회 및 문학과사상사가 재정난으로 이병기 문학상을 더이상 운영할 수 없게됨에 따라 익산시가 운영을 맡아 상을 수여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시는 학계 및 문학가의 저명인사로 운영위원회를 구성하고 창작경력 10년 이상의 시조시인을 대상으로 수상자를 선정해 오는 28일 시상하고 가람선생의 업적을 기리기로 했다. 익산시 관계자는 “선생이 태어난 문학도시로서의 위상을 정립하고 문학인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시가 가람 이병기 문학상 운영에 나서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편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로 널리 알려진 가람 이병기 선생은 익산시 여산면 출신으로 1978년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여산면 원수리에는 생가가 보존돼 있다.익산 소문관 기자 mkso@naeil.com 2000-12-07
- 가람 이병기 문학상 익산시가 주관키로 익산시는 지역출신으로 우리나라 시조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가람 이병기 선생의 뜻을 기리기 위해 그동안 가람시조문학상위원회 및 문학과 사상사가 운영해오던 가람 이병기 문학상을 올해부터 시가 주관해 운영키로 했다. 여산면 출신인 가람 이병기 선생은 현대시조의 개척 및 시조문학의 중흥에 크게 기여해왔으며 지난 1979년부터 가람 이병기 문학상이 제정돼 시조시인들의 창작의욕을 고취하고 선생의 고결한 뜻을 기려왔다.그러나 그동안 시상을 주관해온 이화여자대학교 부설 가람시조문학상 위원회 및 문학과 사상사가 재정난에 처해 이병기 문학상이 폐지될 위험에 처하자 이처럼 시가 운영을 맡아 상을 수여키로 했다는 것. 이에 따라 시는 학계 및 문학가의 저명인사로 운영위원회를 구성하고 창작경력 10년 이상의 시조시인을 대상으로 수상자를 선정, 오는 28일 시상하고 가람선생의 업적을 기리기로 했다. 관계자는 "선생이 태어난 문학도시로서의 위상을 정립하고 문학인의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이처럼 가람이병기 문학상 운영에 나서기로 했다"고 밝혔다. 한편 시조시인이자 국문학자로 널리 알려진 가람 이병기 선생은 익산시 여산면 출신으로 우리고유문학인 시조의 부흥운동에 앞장서 시조문학의 맥을 잇게 한 거목으로 평가받고 있다. 선생은 1978년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여산면 원수리 진사동에는 선생의 생가가 지금까지 보존돼 있다. 2000-1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