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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보는 우리 문화유산 :3 왕권강화를 위한 대역사>선화공주와 선덕여왕이 남긴 아름다운 건축물들 신라의 선덕여왕과 백제 무왕의 왕비였던 선화공주는 신라 진평왕의 딸로 친자매 사이이다. 두 자매는 각각 여왕과 왕비가 되어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은 유명한 건축물들을 남겼으니, 언니 선덕여왕 대에 지어진 경주 첨성대와 분황사탑, 황룡사9층탑과 동생 선화공주 때 건축된 익산 미륵사가 바로 그것이다. 3탑3금당의 가람배치를 한 미륵사 미륵사는 백제 무왕(600~641) 때 창건된 절이다. 무왕의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다. ‘마를 캐서 파는 아이’라는 뜻이다. 신라 진평왕의 딸 선화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서라벌로 가서 를 퍼뜨려 결국 선화공주와 혼인하기에 이른다. 왕위에 오른 그는 어느날 왕비와 함께 길을 가다 용화산 밑 큰 못가에서 미륵삼존을 만난다. 이 못을 메워 미륵삼존의 상을 세우고 법당과 세 개의 탑(동·서탑은 석탑, 중앙탑은 목탑), 세 개의 금당을 세워 미륵사라 이름했다. 신라 진평왕은 100여 공인들을 보내 이 역사(役事)를 도왔다.이상은 《삼국유사》 제2권 편에 나오는 미륵사 창건에 얽힌 이야기다. 실제 1980년부터 본격적인 발굴조사를 실시한 결과, 미륵사지는 미륵이 하생(下生)하여 3회의 설법으로 미래의 중생을 제도한다는 ‘용화삼회설’에 따라 3탑3금당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미륵신앙은 미래의 도솔천, 즉 영원한 평화의 세계를 믿으며 미래의 주인인 미륵불을 받드는 신앙으로 범국민적인 호국정신을 심어주는 사상이었다. 신라의 화랑이 미륵사상과 통하듯 백제의 미륵사상 또한 호국의 상징이었다. “익산 쌍릉은 서동과 선화공주의 무덤” 최근 마한백제문화연구소는 전북 익산시 석왕동에 있는 ‘익산쌍릉’(국가사적 87호)이 무왕(武王)과 그의 부인인 선화비(善花妃)의 무덤인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쌍릉 가운데 대왕묘의 묘실은 길이 380㎝, 너비 178㎝, 높이 227㎝로 지금까지 발견된 고분 가운데 가장 큰 것으로, 규모면에서 왕릉인 부여의 능산리 고분보다도 오히려 품격이 높은 것으로 밝혀졌다. 또 쌍릉의 양식은 묘제 형식상 7세기에 유행한 것이고, 이 시기는 무왕의 재위 및 사망연대와 일치한다. 이 고분은 고려 때부터 왜구의 노략질로 수차례 도굴당했다고 전해지고 있으며, 1917년 일본인학자들에 의해 일부 조사가 이루어졌으나 남아 있는 유물이 거의 없어 무왕과 선화비의 무덤임을 증명하지 못해왔다.그렇지만 《고려사》를 비롯, 《세종실록지리지》 《금마지(金馬志)》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문헌들은 쌍릉은 무왕과 선화비의 무덤이라고 적고 있다.단순한 별자리 관측용이 아니다경주 첨성대는 진평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언니 선덕여왕이 지은 건축물이다. 첨성대는 흔히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단지 천문을 관측하기 위한 용도라면 이처럼 높을 필요가 있었을까?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여러개의 옛 관상대(관천대)는 하나같이 이렇게 생기지도 않았고 높지도 않다. 이미 고구려 때 282개의 별자리에 1464개의 별을 조각해 놓은 석각천문도가 있고 조선조에서 제작한 천문도도 여기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을 보면 관측방식은 다 비슷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첨성대는 어떤 다른 이유 때문에 이렇게 높게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선덕여왕 때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 수많은 내우외환이 발생했던 시기이다. 《삼국사기》 제5권 라본기 선덕여왕>편을 보면 재위 2년과 5년에 백제가 신라 영토를 침범하고 7년에는 고구려가, 11년에는 백제와 고구려가 공모하여 침공한다. 게다가 재위 첫해부터 가뭄이 든다. 2년에는 서라벌에 지진이 발생하고 3년에는 밤(栗)만한 우박이 오는가 하면 8년에는 동해바다가 붉고 뜨거워져 고기들이 떼죽음을 하기도 한다. 16년에는 부하들이 ‘여왕은 정치를 잘하지 못한다’하여 반란까지 일으키고 있다. 왕권 강화의 상징물로 세운 첨성대 선덕여왕대는 신라가 귀족들의 집단지배체제에서 태종 무열왕의 전제왕권 확립기로 넘어가는 마지막 과도기였다. 지방의 토호들은 전래의 무교(巫敎)적 세계관을 내세워 중앙정권의 권위에 도전하고, 이런 와중에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에게 많은 성을 뺏기게 된다. 이런 복잡한 정치상황 속에 선덕여왕은 엄청난 국력을 쏟아부어 첨성대(조성연대는 불분명)와 분황사탑(재위 3년)을 조성한다. 또 재위 12년(645) 3월 중국으로 유학갔던 자장(慈藏)이 돌아오자 그에게 전권을 주어 신라의 정신적 지도자로 삼고 황룡사지 9층목탑(재위 13년)을 쌓는다. 이런 시기에 지어진 신라의 첨성대는 왕권 강화를 과시하는 하나의 상징물이었을 것이다. 별자리를 관측하는 역할보다는 하늘의 뜻을 감지하는 ‘점성대’(占星臺·첨성대의 다른 이름)의 기능이 더 강했을 것이며 이를 위해 보다 높이 쌓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백제 아비지가 쌓은 황룡사 9층탑 《삼국유사》 제3권 편을 보면 아비지가 소장(小匠) 200명을 거느리고 역사를 하는 기록이 나온다. 처음 절의 기둥을 세우던 날 공장 아비지의 꿈에 백제가 멸망하는 것이 보였다. 마음 속에 의심이 난 공장이 일을 멈추자, 문득 천지가 진동하며 어두워지더니 노승 한 사람과 장사 한 사람이 금전문에서 나와 그 기둥을 세우고 사라졌다. 공장은 곧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고 그 탑을 완성시켰다. 완성된 탑의 높이는 철반(鐵盤) 이상의 높이가 42척, 그 이하 본탑의 높이가 183척이었다. 225척을 당시 쓰인 고려척(尺)으로 환산하면 약 80m. 요즘으로 치면 20층 빌딩 위에 철탑이 하나 더 서 있는 높이였으니 서라벌 장안 어디에서나 왕권을 상징하는 9층탑의 광채가 빛났을 법하다. 분황사 주차장에서 남쪽으로 난 소로(승용차 통행 가능)를 따라가면 곧바로 황룡사지로 들어선다. 이 길 오른쪽(서쪽)으로는 거대한 금동불이 서 있던 금당터가 있고 왼쪽(동쪽)으로는 64개의 주춧돌이 남아 있는 목탑터가 자리한다. 황량한 목탑터에 서면 아이들은 주춧돌이 몇 인지 세느라 뛰어다니지만, 어른들은 3만평에 이르는 거대한 절터의 한 가운데서 사라진 탑을 생각하며 몸서리를 치게 된다. 황룡사터에서 안압지쪽으로 나가면 길 건너편에 반월성이 보이고 첨성대는 바로 그 앞에 있다. 기단석은 동서남북 4방위에 맞추고 맨 위 정자석은 그 중앙을 갈라 8방위에 맞추었으며 … 정남으로 향한 창은 춘분과 추분, 태양이 남중(南中)할 때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치게 되어 있고 …― 전상운. 《한국과학기술사》. 정음사 지금까지 알려진 경주 첨성대에 관한 몇가지 상식들이다. 혹자들은 여기에 ‘첨성대 건축에 사용된 돌의 수는 362개로 1년의 날수가 된다’던지 ‘몸체가 27단인 것은 선덕여왕이 신라의 27대 왕임을 상징하는 것’이라는 해석을 덧붙이기도 한다. 그런데 정작 나침반을 들고 가서 실측을 해보면 첨성대 기단석은 정남향에서 서쪽으로 치우쳐 있다. 또 가운데 창문 아래쪽 12단까지는 깬돌과 진흙으로 채워져 있어 햇볕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내려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우리나라의 모든 구조물 ― 탑 성곽 등 ― 은 내부공간이 필요없을 때 이런 방식으로 만든다. 만들기 쉽고 구조적으로도 안전하기 때문이다.정약용은 첨성대의 구조를 ‘규형(圭形)’이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는 우리나라 성곽 가운데 가장 오래된 구조법이며 적이 올라오지 못할 뿐 아니라 성곽이 무너지지 않는 가장 좋은 구조법”이라고 설명하고 이 모양을 따라 수원성곽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 2000-12-01
- '강아지한테 이렇게 해 주세요'<356호/생활> ▷애완견의 품종우리나라에서 많이 키우고 있는 품종에는 요크셔테리어 진돗개 시츄 말티즈 비글 미니어쳐 슈나우저 풍산개 퍼그 코카스파니엘 삽살개 닥스훈트 달마시안 시베리안 허스키 등이 있으며 대부분 외국산이다. ▷강아지의 예방접종혼합백신(DHPPL:홍역, 간염 등) 코로나장염 전염성기관지염(감기) 등은 매년 1회 접종한다. 광견병은 6개월 간격으로 매년 2회 접종하며, 심장사상충(모기)예방은 모기발생시기인 5-9월에 접종하게 되는데 월 1회 접종한다. 예방접종은 생후 6주에 실시하는 것이 가장 좋으며 이 다섯가지는 반드시 접종해야 한다. ▷배변훈련 시키기강아지를 실내에서 키울 때 가장 중요한 훈련 중의 하나가 배변훈련이다. 이때 중요한 점은 상당히 긴 시간과 인내심을 갖는 일. 정해준 자리에 대소변을 보면 크게 칭찬해주고 더불어 포상도 해주도록 한다. 그러나 실수를 하는 경우엔 따끔하게 혼을 내야 하는데 이미 대소변을 보고 난 후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야단치는 것은 효과가 없다. 앞의 일과 연계해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 대소변 훈련은 생후 3개월이 지난 후 하는 게 효과적이다.▷강아지의 발정과 임신암컷 강아지의 첫 발정기는 소형견의 경우 6-9개월, 대형견의 경우 8-10개월 사이에 온다. 사람과는 달리 년 2회 정도의 발정기가 오며 두번째 발정기때 교배하는 것이 가장 좋다. 애완견의 임신기간은 보통 60-63일이며, 임신25일 정도에 초음파검사로 임신여부를 확진할 수 있다. 가람종합동물병원 임병용 원장은 "애완견에 대한 잘못된 지식은 정말 위험합니다. 애완견에게 조금이라도 이상이 생기면 그대로 방치하거나 경솔하게 자가진단을 하지말고 그 즉시 의사에게 보일 것"을 강조했다.핵가족화의 영향으로 애완견을 키우는 가정이 많아진 요즘, 가격이 비싼 외국산 품종에 대한 선호도나 과잉보호 측면에서 새로운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따라서 충견으로 알려진 우리나라의 진돗개나 삽살개에 대해 보다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하며, 애완견에게 지나친 사랑을 주거나 공동질서를 무시한 채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위는 차츰 근절되어야 할 것이다. (도움말: 가람종합동물병원 906-0976 애견센타/ 애견미용실 902-3375)이영란 리포터 dazzle77@naeil.com 2000-10-24
- 해질녘, 무량수전에 기대서서 백두대간을 보자 해질녘, 무량수전에 서서 백두대간을 보자“장엄한 자연과 인공의 건축물이 조화의 극치를 이룬 원융(圓融)의 세계.” 한국화가 이호신씨는 부석사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원융(圓融)’은 불교 용어로 일체 제법의 사리가 골고루 융통되어 가장 뛰어남을 뜻한다. 도대체 부석사가 어떤 절집이길래 몇해째 현지 답사와 사생을 통해 우리나라 가람의 풍광과 진경(眞景)을 그리고 있는 이 화백이 이렇게 평가하는 것일까. 부석사는 백두대간 선달산(1236m)에서 뻗어 내린 봉황산(818m) 자락에 자리한다. 봉황산 서쪽으로는 소백산―죽령―속리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이, 동쪽으로는 옥적산―문수산―천등산 줄기가 달려간다. 삼국통일 직후에 창건된 화엄종찰 000이 두 산줄기 사이에 위치한 부석사는 크고 작은 산들이 머리를 조아린 듯, 사방으로 넓게 트인 시야를 확보하고 있다. 또 멀리 산 아래에서부터 사찰의 전체 모습이 드러나 화엄종의 종찰로서 웅장한 면모를 잘 보여준다. 경주 토함산에서 불국사와 석굴암이 통일신라의 독창적 예술세계를 빚어내고 있을 무렵, 전국각지의 이름난 산에는 다양한 모습의 사찰들이 지어지기 시작했다. 왜 절이 도시를 떠나 산 속으로 들어갔을까. 여기에는 큰산을 신령스러운 곳으로 생각하는 우리 민족 특유의 산악숭배사상과 여러가지 종교적 이념이 작용하고 있었다. 자장이 창건한 통도사, 진표가 창건을 주도한 금산사와 법주사는 중국 유학승들이 가져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와 옷가지 등을 신령한 산에 모시고 절을 지은 예이다. 의상이 창건한 낙산사는 관음이 머물고 계신 곳에 절을 세운 경우인데, 이는 당시 관음신앙이 유행했음을 반증한다. 특히 의상이 중국에서 가져온 화엄사상의 성행은 사찰이 산간에 확산된 가장 큰 계기가 되었다. 화엄 사찰은 그 배치나 건물구성이 도시형(평지형) 사찰과는 전혀 달랐다. 산세에 따라 건물을 배치함으로써 회랑으로 둘러싸인 쌍탑식 가람배치에서 벗어난 새로운 모습을 만들어갔던 것이다. 당나라 침략 앞두고 서둘러 귀국 000의상은 백제가 멸망한 후인 661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10년 전 의상은 현장법사의 귀국소식을 듣고 원효와 함께 중국으로 떠났으나 고구려 순라군에게 잡혀 실패한 경험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당나라 사신이 돌아가는 배를 탔다. 그런데 중국행(行)에 성공한 의상은 현장법사가 아니라 지엄(智儼)을 찾았다. 지엄은 중국 화엄종의 제2조(祖)로 화엄사상의 기초를 다진 인물이다. 당시 중국은 수나라의 강권에 의한 통일이 무너지고 당나라의 이념통치가 확립되던 때였다. 광활한 국토에 다양한 민족, 여러가지 신앙이 뒤엉킨 통일중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강력한 이념적 통일이 필요했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그 어느 하나라도 홀로 있거나 일어나는 법이 없다. 모두가 끝없는 시간과 공간 속에서 서로의 원인이 되며, 대립을 초월하여 하나로 융합하고 있다. … 화엄의 이런 가르침은 서로 대립하고 항쟁을 거듭하는 국가와 사회를 정화하고, 사람들의 대립도 지양시켜 마음을 통일하게 한다. 이는 중국이나 우리나라와 같은 전제적인 통일국가의 정신적 뒷받침이 되었다. ― 이기영. . 《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의상은 명실상부한 지엄의 수제자였다. 그는 중국 화엄학의 3대조로 일컬어지는 법장 ― 측천무후를 도와 당나라의 이념체계를 세운 승려 ― 의 선배였으며 38세에서 44세에 이르는 중요한 시기 8년 동안 지엄으로부터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배웠다. 그 사이 삼국이 통일되고(668) 당과 통일신라의 7년 전쟁이 예고되고 있었다. 이 전쟁이 터지기 직전, 의상은 서둘러 신라로 돌아온다. 《삼국유사》는 “의상이 당나라 고종의 신라 침략을 본국에 알리기 위해 서둘러 귀국했다”고 기록한다. 부석사의 창건은 신라 문무왕 16년(676),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직후의 일이다. 당시 문무왕은 의상대사로 하여금 화엄종의 근본도량으로 부석사를 창건하게 하고, 그 북쪽에 나생군(삼천당)이라는 군단을 조직하여 배치했다. 같은 시기에 백두대간을 축으로 남쪽과 북쪽에 절과 군대를 신설한 것은 통일 직후 당나라 침략군에 대한 적극적인 방비책이었다. 《삼국사기》는 이 지역을 신라와 고구려의 영토 쟁탈전이 가장 심했던 군사적 요충지로 기록한다. 아직 비포장으로 남아 있는 부석리―마구령―주막거리―고치령(경북·충북 경계)―영춘(온달성 일대) 고갯길은 당시 경주에서 한강 유역으로 넘어가는 중요한 통로 가운데 하나였다. 안동지방에만 있는 중국식 전탑 000의상은 당시 신라의 문무왕과 직접 교류할 만큼 커다란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그런 그가 왜 서라벌 장안이 아닌 태백산 쪽 변방에 절을 짓고 화엄의 가르침을 펼쳐나갔을까. “그때 신라의 기득권들은 의상의 서라벌 입성을 반대했다. 그러자 의상은 영남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태백산 줄기 봉황산 기슭에 ‘해동화엄종찰’ 부석사를 창건했다.” 안동대 국학부 이효걸 교수는 “결국 의상은 안동지방을 중심으로 화엄사상의 새로운 문화지대를 만들어 경주로 입성하게 된다. 이는 전국에서 유일하게 안동지방에만 집중적으로 세워진 중국식 전탑의 사례를 봐도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의상은 비록 유학파였지만 당시 국내에서 활동하던 원효의 ‘정토사상’을 토대로 화엄사상을 펼쳐나갔다. 화엄사상은 대중들이 인식하기에 무척 어려운 우주론적 인식을 필요로 한다. 그렇지만 ‘이 땅이 곧 정토’라는 원효의 가르침은 대중적인 이해가 빠르다. 의상은 원효의 정토사상을 통해 대중들을 화엄의 세계로 이끌어낸 위대한 스승이었다.부석사는 이런 그의 사상적 특징 ― 중국식 화엄종이 아닌 우리식 화엄종 ― 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찰이다. 이효걸 교수는 △《관무량수경》의 ‘3배9품’ 이론을 적용한 진입로 층계 구성 △주전에 비로자나불이 아닌 아미타불을 모신 점 등을 들어 “화엄종찰인 부석사가 사실은 가장 완벽한 정토종 사찰의 배치를 따르고 있다”고 분석한다. 부석사 무량수전 아미타여래(무량수불)는 좌우에 아무런 협시보살 없이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서쪽에 앉아 있는 아미타여래에게 경배하는 사람들은 자연히 그 뒤에 있는 소백산 비로봉을 향해 절을 하게 된다. 비로봉은 곧 비로자나여래를 뜻한다. 이는 아미타여래와 비로자나여래를 동일시했던 의상의 신라식 화엄사상을 잘 보여준다. 석축과 축의 굴절로 변화무쌍한 구성 000창건 이래 몇차례 외침과 화재를 겪었지만 부석사는 원래의 가람 배치 형식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는 절이다. 수십 편의 학위논문에서 다루고 있을 만큼 부석사의 가람 배치는 아주 짜임새 있고 과학적이다. 건축학을 전공한 이들은 부석사를 “지형의 변화를 이용한 석축과 축의 굴절을 통해 전체적으로 변화무쌍한, 드라마틱한 구성을 이루고 있는 사찰”이라고 평가한다. 부석리에서 일주문으로 들어가 천왕문―범종각―안양루를 거쳐 무량수전, 다시 조사당과 웅진전까지 가는 길을 천천히 올라가 보자. 서둘러 올라가면 힘만 들고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일주문에서 천왕문까지는 흙 바닥에 넓은 자연석이 깔린 비탈길이다. 은행잎이 떨어질 무렵 이 길은 온통 노란 양탄자를 깔아놓은 샛노란 은행잎으로 뒤덮힌다. 천왕문을 지나면 1300년이 넘은 장대한 석축이 있고 이 석축을 오르면 종무소 종각 범종각 등의 당우(堂宇)가 나타난다. 길은 이제 정연한 돌축대와 돌계단으로 이루어진 인공의 길이다. 앞은 팔작지붕이지만 뒤는 맞배지붕인 범종각 누(樓)를 통과하면 또 하나의 석축이 나타난다. 두번째 석축을 오르면 길은 왼쪽으로 약간 꺾이며 정면으로 안양루, 좌우 2000-10-20
- 교육단신<352호/교육> 수능 원서 마감오는 11월15(수)일 실시되는 2001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원서 접수가 지난 9월16일 마감됐다.경기도내 지원자는 총 12만7천139명으로, 이는 작년에 비해 1.6%늘어난 2천20명이 더 지원했다. 경기도교육청은 지난 9월1일부터 11일간 응시원서를 접수하였는데, 금년도 지원자는 남자 6만6천861명, 여자 6만278명으로 나타났다. 이는 지난해에 비해 남자는 568명, 여자는 1천452명이 늘어난 것이다.이를 응시희망 계열별로 보면 인문계가 6만6천379명, 자연계가 3만2천418명, 예·체능계가 2만8천342명순이다. 지난해에 비해 특히 자연계열 응시희망자가 6천541명이 감소하고 예·체능계가 6천191명이나 증가했다. 이는 최근 일부대학에서 계열교차지원을 허용한 것 때문인 것으로 판단된다.지원자를 학력별로 보면 졸업예정자가 9만513명으로 가장 많고, 졸업자가 3만4천614명, 검정고시합격자가 1천983명 순이다. 특히 졸업예정자는 513명이나 감소하였으나 졸업자가 전년에 비해 2천374명이나 크게 늘어 난 것은 졸업예정자중 실업계 학생들의 수능 응시 지원자가 감소한 것과 금년도에 문제가 쉽게 출제될 것이라는 한국교육과정평가원의 발표 때문에 지난해 대입을 포기했던 수험생이나 일부대학 재학생들의 재응시 때문으로 추측된다.한편 금년부터 처음 치러지는 제2외국어 지원 현황을 보면, 전체 지원자중 31.5%인 4만32명이 제2외국어를 선택했다. 이중 일본어를 선택한 수험생이 1만6천474명으로 전체선택자의 41.2%에 달했다. 다음으로는 중국어로 23.9%인 9천564명이며, 독일어와 프랑스어는 18%와 13%의 학생이 선택했다. 최저 지원과목은 러시아어로 1.1%인466명만 지원했을 뿐이다. 지난해에는 95명이 지원했던 특별관리대상자가 금년에는 20명 늘어난 120명이 지원하였는데, 경기도교육청은 이들을 위하여 시험실을 특별히 배정하는 등의 편의를 제공할 예정이다.이번 응시원서를 접수한 수험생중 최연소자는 고양시 일산구 탄현동에 사는 신현태군으로 13세(87년생)이며, 최연장자는 부천시 원미구 중동에 거주하는 홍병학씨로 64세(36년생)이다. 또한 평택지구에는 43세의 어머니와 18세의 딸이 나란히 원서를 제출하여 화제가 되고있다. 금번 대학수학능력시험에 응시 원서를 접수한 수험생은 11월14일 각 시험지구 교육장이 지정한 예비소집 장소에 집합하여 수험표를 교부 받고, 11월15일 지정된 시험지구의 시험장에서 응시하여야 하며, 성적은 12월12일 발표될 예정이다.(중등교육과 : 031- 2490- 201) 학생들 평균체격, 10년 전보다 좋아져 경기도내 학생들의 평균체격이 10년전에 비해 크게 좋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같은 사실은 지난 5월 도내 초·중·고 각 12개교씩 모두 36개교 7천248명을 대상으로 한 신체검사에서 나타났다. 특히 키와 몸무게는 10년전에 비해 남학생은 평균 3cm이상, 여학생은 2cm이상 커졌다.조사결과에 의하면 초등은 남·녀 모두 체력성장이 비슷한 반면, 중등은 여학생보다 남학생 성장이 두드러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신장은 남학생 초등134.3cm 중등161.3cm 고등172.2cm로 10년전에 비해 각각 3.0cm 3.7cm 3.7cm가 커졌다. 반면 여학생은 초등133.9cm 중등156.9cm 고등159.6cm로 10년전보다 2.9cm 2.3cm 1.7cm가 각각 성장했다. 몸무게는 남자는 초등32.6kg 중등52.8kg 고등62.9kg으로 10년전에 비해 3.0kg 6.3kg 4.1kg이 늘었다. 이에 비해 여자는 같은 기간동안 각각 2.7kg 3.4kg 1.1kg이 늘어나 상대적으로 성장률이 뒤진 것으로 나타났다. (평생교육체육과 : 031- 2490- 179).고양시 중학교 영어 말하기 대회, 수상자명단 2000년 9월 20일(수)에 있었던 고양시 중학교 영어 말하기 대회입상자의 결과 아래와 같다. 최우수(국내부문) 남보리 김신명 석연수(장성중) 최우수(해외부문) 임은형 이양정(지도중) 우 수(국내부문) 권초롱 김재헌 박세현(가람중) 이소영 김혜림(한수중) 우 수(해외부문) 이은송 배근영 황선옥(중산중) 장 려 안영주 최은지(백신중) 유병우 정장함 백귀나(화수중) 박지혜 한미애 구정현 오세영(오마중) 김민석 신지영 정선윤(무원중) 박익성 임한나(화정중) 2000 전국 학생 발명 창작 경진대회2000 전국 학생 발명 창작 경진대회가 지난 8월18일부터19일까지 서울 수도전기고등학교에서 열렸다. 대회결과 고양시에서는 한수 초등학교가 아래와 같이 우수한 성적의 결과를 올려 과학특성화 초등학교임을 다시한번 입증하였다. 시상은 9월15일 서울 서부 교육청에서 열렸다.금상 : DIG팀 - 6학년 정종오, 5학년 윤국, 4학년 김한나, 3학년 김재연, 3학년 박예슬동상 : BONE팀 - 6학년 박형근 이수정, 5학년 권혜성, 4학년 김민수, 정영훈장려상 : KOD팀 - 5학년 최중륜, 4학년 정승오, 3학년 현수빈특별상 : BONE팀 2000-09-26
- 349호<교육> 고양시 독서경시 대회 2000년 8월 29일 실시된 독서경시 고양시대회 결과 수상자는 아래와 같다. ▲최우수: 양무현(행신중)/▲금상: 강은영(화정중, 양소영(중산중) 이상 3명은 도대회출전 ▲은상: 이지은(한수중) 유인선(저동중, 김지현(백신중) 정지은(가람중) 류성유(신일중)/▲동상: 이민주(신일중) 박준석(장성중) 이민희(화수중) 유미나(일산동중) 이지현(일산동중) 배혜선(오마중) 남경미(화정중)/▲장려: 김희원(정발중) 천지혜(백양중) 이현진(발산중) 김승희(백신중) 차영은(고양중) 백정현(대화중) 김지은(무원중) 정혜윤(백마중) 오한이(백석중) 평가내용은 1교시(단답형 16문항, 서술형 6문항) 2교시(논술) 각각 100점씩 200점 만점으로 처리하였고 평가기준은 도에서 제시한 기준으로 채점했다.논술 평가영역으로는 내용의 생성, 내용의 조직, 논리적 사고, 사회적 사고, 언어의 표현(영역별 평가내용은 2개씩) 등을 심사하였고 기본점수 처리는 평가내용별 5점(총점 50점)으로 기본점수를 부여했다. 2000-09-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