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으로 도약하는 철강 신화> ① 세상을 움직이는 ‘소리 없는 강자’

맨주먹으로 일구어 낸 제철보국 포스코, 세계 철강업의 리더로 부상

지역내일 2005-05-26
첨단 재질이 하루가 멀다 하고 쏟아져 나오는 현대 사회지만 철강은 여전히 ''산업의 쌀''로 통한다. 제철산업은 자동차, 조선, 건설 등 전방수요산업의 소재이고 중화학공업의 기반이며 군사 무기의 주재료다.
이런 이유에서 제철산업은 일찍이 국력의 가늠자로 평가되어, 선진국들은 제철 능력 확보에 총력을 기울여 왔다. 무엇보다 철강은 한국 경제 근대화의 초석이라 불려 손색이 없으며 그와 같은 지위는 전적으로 포스코(포항제철)의 성공에 힘입은 것이다. 본지는 이 연재를 통해 반도체, 자동차 등에 비해 여전히 덜 주목받고 있는 철강 산업을 살펴 그 정당한 위상을 확인코자 한다. /편집자 주

한국 경제가 오늘과 같은 모습을 갖추기까지 숱한 기업들이 기여했지만, 종합제철소 건설이라는 숙원사업을 현실화시킨 포항제철을 그중 맨 앞자리에 두어 손색이 없다.
1968년 4월 1일 중화학공업 육성과 수출 입국이라는 국가적 과제에 부응하기 위해 설립된 포항제철. 미국 기업들이 차관 제공을 약속해 서둘러 만들어진 이 회사는 그러나 출발부터 위기에 빠졌다. 우여곡절 끝에 차관 도입이 성사되자 이번에는 부지 매입과 철거라는 벽을 넘어야 했고, 다음에는 영일만의 거센 모래바람과 맞닥뜨렸다.
사막의 전쟁이라 불릴 정도로 악전고투가 이어졌지만, 공기 지연을 막기 위해서는 누구도 현장을 떠날 수 없었다. 야전지휘소를 연상케 하는 이른바 ‘롬멜 하우스’가 만들어졌고, 박태준 사장은 이곳을 중심으로 모든 일과를 현장에서 보냈다. “여기서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 하여 영일만에 빠져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직원들에게 ‘우향우 정신’으로 불렸다.
군대 같은 조직력과 필사즉생의 집념 끝에 마침내 1973년 6월 최초의 쇳물이 터졌고, 이어 1기 설립이 마무리됐다. 포항 1기건설에는 39개월의 공기에 1204억원의 자금이 투입되었는데, 이는 당시 국제적으로 유례없는 단기간, 저비용 공사로 알려졌다. 출발부터 세계를 놀라게 한 그 힘은 지금까지도 이어져, 오늘 포스코는 조강생산 세계 5위이면서 원가 경쟁력, 재무구조, 수익성 등 경영실적 면에서 단연 세계 최고 기업으로 올라섰다.
1987년 정부는 ‘주인 있는 경영’을 목표로 일부 공기업의 민영화를 단행했는데, 이에 따라 포스코는 한국전력과 함께 국민주 모집 방식으로 민영화되었다.
비슷한 시기인 1988년 영국 대처 정부 하의 브리티시 스틸사 민영화, 1995년 프랑스 발라뒤르 내각 하의 유지노사 민영화 등이 모두 공기업의 경쟁력 제고 방안으로 추진된 것인데, 3사의 이후 경영실적에서 포스코는 단연 앞서 나갔다. 영국과 프랑스 두 업체는 민영화 이후 경영정상화에 난맥상을 보이더니 결국 인수합병으로 규모를 키우는 길을 택했다. 그러자 다른 철강회사들도 이 대열에 뛰어들어, 세계 철강업계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합종연횡 시대로 접어든 느낌이다.
반면 한때 ‘강철왕’카네기 같은 스타를 탄생시키며 세계를 주름잡은 미국 업계의 상황은 초토화를 연상케 한다. 해외 업체에 비해 가격에서 밀리고 기술적으로 떨어지며 안정적인 수요처를 확보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미국 업체들이 그간 보여준 대응은 이러한 몰락이 불가피했음을 알게 한다.
미국 철강 산업은 70년대를 지나면서 하락세로 돌아섰다. 80년대에는 대규모 적자로 주요 기업이 파산보호를 신청했고, 이후 자구 노력으로 회생하는가 싶더니 90년대 들어 다시 적자를 지속, 사실상 파산한 기업이 늘어났다.

2000년 들어서도 상황이 크게 개선되지 않아 2001년 업계 가동률이 65%대로 하락했고, 베들레헴 스틸 등 업계 수위를 달리던 기업들이 차례로 파산보호 신청을 낸 이후 3년간 무려 2만5600명이 일자리를 잃었다. 이 때문에 미국에서 철강산업은 이제 대표적인 사양산업으로 손꼽힐 지경이다.
미국 업계의 경쟁력 약화는 먼저 높은 가격 때문이고, 그 바탕에 높은 원가 비중 즉 고임금과 연보험 비용이 자리 잡고 있다. 예를 들어 2000년도 미 철강 5사의 평균 매출원가 비중은 91.2%에 달했는데, 같은 해 일본 신일철은 83.4%, 포스코는 77.4%에 불과했다. 제조업 평균치의 1.5배를 웃도는 임금상승률과 퇴직자의 연보험료와 같은 고정비적 성격의 지출 부담이 그 주범이지만 마땅한 개선 방안이 없다는 데 미국 철강업계의 고민이 있다.
그 와중에도 기술력이 탄탄한 누코 등 일부 업체는 대규모 흑자를 기록해, 미국 철강 산업이 높은 가격 때문만이 아니라 낮은 기술력 때문에도 경쟁력을 잃고 있음을 스스로 입증한 셈이 됐다. 더욱이 세계적인 과잉설비 상황에서 다수 업체들은 투자를 백안시하다 스스로 족쇄를 채웠다. 예를 들어 미국 내 열연 내수가격은 80년 초부터 꾸준히 하락, 2000년에는 20년 전의 66% 수준까지 떨어졌지만, 같은 기간 설비투자액은 겨우 10% 늘어난 데 그쳤다.
연구개발비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1999년 한해 미 주요 업체의 평균 투자비율이 0.5%에도 미치지 못한 데 비해 신일철은 2.19, 유지노는 1.19%, 그리고 포스코는 1.27%에 달하는 1억3588만달러를 쏟아부었다. 포스코의 경우 1989년 0.94%에서 2003년 1.62%로 연구개발비 비중을 매년 늘리는 추세이므로, 그 격차는 향후 더욱 벌어질 전망이다.

미국 철강업계에 대한 우리 국민 특히 포스코의 유감은 일찍이 19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12월 미국은 자국 업체를 중심으로 한국의 제철소 건설 지원을 약속하는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을 발족했고, 우리 정부는 그를 믿고 밑천도 없이 회사를 설립하고 영일만 일대 300만평 부지를 갈아엎었다.
그러나 1968년 국제부흥개발은행(IBRD) 조사단은 ‘한국 경제동향 보고서’를 발표하면서 사실상 차관 제공 거부 의사를 피력했다. 미국이 이를 근거로 차관 제공을 지연시키자 다급해진 박태준 당시 사장은 대일청구권 자금 일부를 전용할 것을 건의했다. 이를 정부가 받아들이면서 일본과 교섭을 시작했는데, 그 와중에 미국 측은 제철소 건설의 타당성 부족을 이유로 차관지급을 부정하는 최종 공문을 보냈다.
우리 측이 이에 굴하지 않고 일본 정부와 업계 대표들을 끈질기게 설득한 결과, 마침내 1969년 12월 종합제철소 지원을 골자로 하는 한일 기본협약을 이끌어냈다. 정부가 제철소 건립안을 마련한 지 실로 11년만의 일이다.
미국 철강업계는 한때 “한국인은 제철소를 운영할 능력이 없다”고 주장했다. 오늘 그들은 거듭된 추락 속에 비상하는 포스코를 올려다 보고 있다. 과거 보잘 것 없던 한국 기업에게 안방을 내준 그들은, 이제 자신의 존립을 걱정해야 할 처지로 내몰렸다.
세계 철강업계가 고도성장을 끝내고 조만간 성숙기로 접어들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한 가운데, 대외적으로 중국이 부상하고 대내적으로 산업 공동화 현상이 심화됨에 따라 우리 철강 산업도 이에 적응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됐다. 또한 굴지의 해외 기업들이 인수합병을 통해 생산과잉이나 과당경쟁 같은 문제를 해결하려 들고 있어 해마다 초대형 업체가 탄생하는 중이며, 이에 대한 대응도 만만치 않은 과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 철강업계를 보는 세계의 시선은 경이에 가까운 것이다. 이미 미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1999년부터 2003년까지 5년 연속 포스코를 세계 최고 철강사로 선정했다.

무엇이 포스코를 세계가 두려워하는 기업으로 만들었을까? 이와 관련, 경영 컨설턴트 짐 콜린스가 언급한 위대한 기업의 형성과정은 놀라울 만치 포스코의 역사와 일치한다.
콜린스는 먼저 위대한 기업들은 단기간에 만들어지지 않으며, 수십 년간 꾸준히 성장하다 어느 전환점을 거치며 도약한다고 밝혔다. 왼쪽 표에서 나타난 대로 포스코는 72년 이래 성장을 지속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잠시 기복을 거친 뒤, 2000년대 들어 폭발적으로 도약하는 중이다.
콜린스는 경영자를 구분하여 뛰어난 개인보다 팀 리더를, 나아가 개인적 겸양과 직업적 의지를 결합한 인물을 이른바 ‘단계5의 리더십’으로 격상했다. 포스코의 주춧돌을 놓은 박태준 명예회장의 모습이 이에 해당함을 부인키는 어렵다.
이와 함께 설립 초기 포항제철은 사업의 전략과 비전을 짜느라 시간을 낭비하는 대신, 먼저 인재를 모았다. 그런 다음 그들과 함께 모래먼지 자욱한 영일만 백사장으로 곧장 달려갔다. 회사는 ‘천 명의 조력자를 가진 한 명의 천재’가 아니라, 잘 살아보자는 일념에 모든 것을 바칠 일꾼들을 중시했던 것이다. 약소국 국민으로 차관 거부라는 수치까지 겪은 그들은, 남들이 희망찬 미래를 꿈꿀 시간에 냉혹한 현실을 직시하며 맨땅을 파헤쳤다.
여우는 온갖 꾀를 지녔지만 결코 고슴도치를 잡아먹지 못한다. 고슴도치는 생존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몸을 둥글게 마는 단순하고 핵심적인 결론을 잊지 않기 때문이다.
포스코는 궤도에 올라선 뒤에도 한 가지 단순한 개념,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창립이념에 매달렸고, 다른 비전이나 외도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 때문에 먼저 직원들의 밥을 해결하려 했고, 그들이 열정을 가지고 달려들 일(사업)을 창출했으며, 그 와중에도 세계 최고 기업으로 나아간다는 꿈을 잃지 않았다.
아무리 뛰어난 기업 정신도 엄격한 규율을 갖추지 못한다면 미래가 없다. 포항제철은 처음부터 투명화를 위해 정부 재정 지원이라는 유혹을 포기하면서 상법상 주식회사로 출발했다.
그리고 공장을 세우기 전에 사옥을 먼저 짓고 철저한 공개채용을 고집했으며, 그와 함께 롬멜 하우스와 우향우 정신으로 경영자와 노동자 사이에 끈끈한 결속을 이루어냈다. 이런 문화가 관료제 대신 임직원의 규율 있는 행동을 창출했고, 그로써 보기 드물게 안정된 노사관계를 정착시켰던 것이다.
콜린스는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기업은 기술에 의존하는 대신 그것을 성장의 발판으로 활용한다고 주장했다.
월마트의 창업자 샘 월튼이 대표적인 경우다. 월튼은 1945년 10센트짜리 물건을 파는 가게를 냈는데, 돈을 벌면 일단 점포부터 늘리던 당시 관행을 무시하고, 7년 뒤에야 두 번째 가게를 냈다. 자신의 일을 완벽하게 이해할 때까지 숱한 실험을 했고, 그로써 ‘상시최저가(Every Day Low Price, EDLP)’ 정책을 확립한 것이다. 유통업계 세계 선두를 달리는 오늘의 월마트는 자신의 간결한 정책에 충실했고, 기술을 그 기반으로 활용했기에 가능했다.
포스코가 그와 같았다. 회사는 기술에 매달리는 대신 생산하면서 동시에 판매하고자 했고, 국내 시장에 내놓는 동시에 수출시장을 개척하려 했다.
그런 식으로 살아남기에 충분한 시장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필요에 의해’경쟁사를 물리칠 기술을 찾아냈고, 총력을 기울여 이를 개발했다. 파이넥스 공법이나 스트립 캐스팅 등 혁신 기술은 그러한 철학의 산물이다. 이제 이 기술들은 포스코의 지속성장, 나아가 한국 철강 산업의 리더십을 유지하는 가속페달로 사용될 것이다.

/김선태 기자 kst@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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