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해후 낙엽에 유기 주장 납득 안돼 … 살해가담 동유럽인은 가공인물 가능성 커
수사본부, 이상열 공사 등 수사 … ‘르몽드’, ‘주간문춘’서 서울압송 의혹 제기
주섭일 중앙일보 전 프랑스 특파원은 ‘김형욱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프랑스에 없다’는 당시 프랑스 경시청의 수사발표를 근거로 김형욱이 파리 근교 숲속에서 살해된 뒤 버려졌다는 진실위의 발표에 의혹을 제기했다. 주 전 특파원은 김형욱 실종 몇 달 뒤 ‘김형욱이 한국정보기관원에 의해 납치돼 서울로 압송됐으며, 청와대에서 총살됐다’는 내용의 문서가 언론인들에게 전달됐으며, ‘르몽드’와 일본의 ‘주간문춘’에서 이를 확인 보도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냉전중이던 당시 정세를 고려할 때 진실위가 발표한 김형욱을 직접 권총으로 살해했다는 2명의 동유럽인은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주 전 특파원으로부터 김형욱 실종사건 당시 상황과 프랑스 경시청의 수사과정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편집자주
- 김형욱 실종사건은 어떻게 해서 보도됐나
김형욱이 실종된 지 며칠 후 조선일보에서 특종을 했다. 뉴욕에 있는 김형욱의 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했다. 남편이 파리에 갔는데 연락이 전혀 안되니 연락이 되면 전화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같은 전화를 받고 조선일보가 79년 10월 16일자 1면 톱기사로 ‘김형욱 행방불명’에 대해 보도했다.
- 당시 프랑스 경시청의 대응은
프랑스 경시청에 까르타 형사부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김형욱 실종사건 수사본부가 차려져 4개월 동안 철저한 수사가 진행됐다.
까르타 본부장을 처음 만났을 때 “김형욱은 한국의 중정부장 출신으로 미 상원에서 박 정권에 불리한 증언을 했고, 파리에서 실종됐으니 이 사건은 국제적인 사건인데 파리 경시청만으로 수사가 가능하겠느냐”고 질문했다. 그의 답변은 프랑스 뿐 아니라 미국·프랑스 정보기관의 협조를 받아 입체적인 수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미·프랑스 공조체제하에 철저하게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수사는 어떻게 진행됐나
사건 발생후 3주쯤 지나 까르타 본부장을 만났는데 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먼저 얘기를 꺼냈다. 프랑스의 모든 살인사건, 자살, 행려병자 중 사망한 시신을 철저히 조사했지만 김형욱과 유사한 시신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수사를 더 해보겠지만 김형욱이 프랑스에서 빠져나간 것 같은 의심이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까르타는 ‘깜짝 놀랄만한 한국 고위 외교관’을 소환해 조사했으며 조사 내용은 김형욱 사건의 방향을 설정하고 참고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외교관은 이상열 공사였다.
당초 수사본부는 이 공사를 두 차례 조사할 계획이었는데 본격적인 조사를 앞두고 이 공사가 서울로 가는 바람에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 즈음 프랑스 대사관에 이상한 일이 있었다. 당시 민병기(작고) 대사가 대사관에 도둑이 들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대사관 방과 지하실을 모두 뒤진 흔적은 있는데 없어진 것은 양주 한 병뿐이어서 이상하다고 했다.
아마 프랑스 정보기관이 대사관이 개입한 혐의를 두고 김형욱을 찾기 위해 도둑으로 위장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공사를 소환 조사하고, 정보기관이 도둑을 가장해 대사관을 수색하자 이 공사를 한국으로 빼돌렸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당시 수사본부는 이 공사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강도 높은 수사를 진행한 것으로 봐야 한다.
사건 발생 2주후 경시청을 찾았다가 김형욱 부인 등 가족을 만났는데 그들도 ‘이상열 공사에게 물어봐라. 다 알 것이다’고 하더라. 김형욱 부인도 수사본부에 이 공사를 지목했던 것 같다.
- 수사결과는 어땠나
4개월 후 까르타가 브리핑에 참석해줄 것을 요청했다. 브리핑 내용은 “4개월 동안 시신수색 등 철저한 수사를 했지만 김형욱은 생존해 있든 죽었든 파리에는 없다는 결론을 냈다”는 것이었다.
- 이상열 공사는 어떤 사람인가
김형욱 회고록을 검토한 중앙정보부는 이상열 전 프랑스 공사를 교섭창구로 삼았다. 이상열은 김형욱이 중정부장 시절 가장 신뢰하던 오른팔로 김형욱이 뉴욕에서 파리로 올 때마다 수행하면서 안내했던 인물이다.
사건발행 10일 후 모 일간지 특파원과 함께 이 공사를 만났다. 그는 사건 전날밤 12시까지 김형욱과 함께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프랑스 도박장에서는 술과 음식이 공짜였는데 김형욱이 술을 많이 먹고 주정을 했다고 했다. 이 공사는 종업원이 김형욱을 수습하는 것을 보고 귀가했다고 주장했다. 이 공사와 있던 다음날 오전 11시 키 큰 동양인이 김형욱과 함께 도박장에 간다고 이야기 한 후 김형욱이 실종됐다. 이는 샹제리제 뒷골목에 있는 웨스트엔드 호텔 여종업원의 진술이다.
조선일보 보도 이후 기자들이 웨스트엔드 호텔로 달려갔을 때에도 김형욱의 소지품이 있었다.
나중에 김형욱이 과연 그 호텔에 갔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호텔 리츠에서 만취된 상태에서 납치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왜 그런 의문이 들었나
수사본부의 수사결과 발표 뒤인 80년 3월경 한 문서가 우편으로 배달됐다. 제목도 없이 유창한 불어로 김형욱 사건 개요가 나열된 문서에는 김형욱이 리츠호텔에서 한국정보기관원들에 의해 파리 15구 니꼬호텔 근처 한 아파트로 납치됐고, 일본 마담 소유의 이 아파트에서 마취된 김형욱이 다음날 외교행낭편으로 KAL기에 실려 서울로 압송됐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청와대 지하에서 총살됐다고 나와 있었다.
10여일이 지난 뒤 일본의 ‘주간문춘’에 동경특파원 발로 동일한 내용의 문서 사진과 함께 기사가 났다. 또 르몽드지도 동일한 내용을 발췌해 보도했다.
기사를 보고 당시 편집국장인 앙드레 퐁텐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된 내용이냐고 물었더니 “(출처가) 확실치 않은 보도는 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아마도 이 문서는 프랑스 정보기관이나 사건 전모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작성해 파리주재 특파원이나 언론인들에게 흘렸을 것으로 생각한다. 문서 내용이 이 공사가 했던 얘기와 유사했다.
- 국정원 진실위에서는 김형욱이 프랑스에서 살해됐다고 발표했는데
우선 김형욱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프랑스 경시청에서 미·프랑스 정보기관의 협조를 받아 4개월이나 수사했다. 낙엽에 덮여 버려진 시체가 나오지 않았다는게 이해가 되나.
또 김형욱을 직접 살해했다는 동유럽인도 가공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당시는 프랑스가 냉전의 한복판이었다. 동유럽인이 한국 유학생에게 포섭됐다는 것은 상식 이하다.
당시 정황상 동양인 부탁이 들어왔다면 즉시 신고했을 것이다. 만약 그게 사실이었다 해도 시간이 지나 폭로하는 것이 유럽인의 성격상 고백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 프랑스 내 양계장에서 살해됐다는 주장도 있는데
양계장에서 살해했다는 것도 상식밖 주장이다. 양계장 분쇄기를 이용하려면 주인이나 종업원의 공모가 있어야 가능하다. 프랑스 사람들 특성상 즉시 경시청에 신고했을 것이다.
- 김형욱 실종사건의 의혹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떤 조사가 필요하다고 보나
우선 프랑스 수사당국의 협조를 얻어 수사기록을 넘겨받고 현장조사를 반드시 해야한다고 본다. 당시 프랑스에서 미국의 협조를 얻어 철저하게 수사했다. 광범위한 자료를 갖고 있을 것이다. 73년도 파리특파원 당시 개인 운전면허 기록까지 갖고 있더라. 4개월간이나 수사를 진행했으니 기록이 잘 보존돼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상열 공사에 대해서도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 김형욱이 납치 후 총살됐다면 이 공사는 암살공작 주모자에 해당한다. 반드시 고백을 받아내야 한다.
프랑스의 살인죄 시효는 10년이지만 반인도 범죄는 실효가 없다. 향후 프랑스가 이 공사에 대해 범인인도요청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정원은 철저히 조사해야한다고 본다.
/김기수·구본홍 기자 bhkoo@naeil.com
주섭일 전 프랑스 특파원은 누구
취재와 연구 겸한 ‘프랑스통’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한 당시 프랑스 경시청의 수사내용을 소개한 주섭일 전 특파원 은 국내에서 몇 안되는 ‘프랑스통’이자 ‘유럽통’이다.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신문, 중앙일보 기자로 근무한 주 전 특파원은 1972년부터 프랑스 특파원을 역임했고, 87년에는 프랑스 파리 제13대학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또 지난 95년에는 프랑스 파리외교전략대학원 최고지도자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대한 오랜 취재와 연구가 밑받침이 돼 주 전 특파원은 프랑스와 유럽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89년 세계일보 유럽총국장, 96년 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를 맡았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주 전 특파원은 기사 외에도 ‘프랑스혁명과 한말변혁운동’ ‘소련 오해받고 있다’ ‘한지붕 유럽 그리고 분단한국’ ‘지도자와 역사의식’ ‘프랑스의 대숙청’ 등 저서를 통해 프랑스와 유럽에 대한 식견을 보여준 바 있다.
주 전 특파원은 98년 참여연대 고문, 2000년 내일신문 주필, 2002년 경원대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등을 지냈다.
수사본부, 이상열 공사 등 수사 … ‘르몽드’, ‘주간문춘’서 서울압송 의혹 제기
주섭일 중앙일보 전 프랑스 특파원은 ‘김형욱은 살아서든 죽어서든 프랑스에 없다’는 당시 프랑스 경시청의 수사발표를 근거로 김형욱이 파리 근교 숲속에서 살해된 뒤 버려졌다는 진실위의 발표에 의혹을 제기했다. 주 전 특파원은 김형욱 실종 몇 달 뒤 ‘김형욱이 한국정보기관원에 의해 납치돼 서울로 압송됐으며, 청와대에서 총살됐다’는 내용의 문서가 언론인들에게 전달됐으며, ‘르몽드’와 일본의 ‘주간문춘’에서 이를 확인 보도하기도 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냉전중이던 당시 정세를 고려할 때 진실위가 발표한 김형욱을 직접 권총으로 살해했다는 2명의 동유럽인은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했다.
주 전 특파원으로부터 김형욱 실종사건 당시 상황과 프랑스 경시청의 수사과정 등에 대해 들어보았다. /편집자주
- 김형욱 실종사건은 어떻게 해서 보도됐나
김형욱이 실종된 지 며칠 후 조선일보에서 특종을 했다. 뉴욕에 있는 김형욱의 부인에게서 전화가 왔다고 했다. 남편이 파리에 갔는데 연락이 전혀 안되니 연락이 되면 전화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같은 전화를 받고 조선일보가 79년 10월 16일자 1면 톱기사로 ‘김형욱 행방불명’에 대해 보도했다.
- 당시 프랑스 경시청의 대응은
프랑스 경시청에 까르타 형사부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김형욱 실종사건 수사본부가 차려져 4개월 동안 철저한 수사가 진행됐다.
까르타 본부장을 처음 만났을 때 “김형욱은 한국의 중정부장 출신으로 미 상원에서 박 정권에 불리한 증언을 했고, 파리에서 실종됐으니 이 사건은 국제적인 사건인데 파리 경시청만으로 수사가 가능하겠느냐”고 질문했다. 그의 답변은 프랑스 뿐 아니라 미국·프랑스 정보기관의 협조를 받아 입체적인 수사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미·프랑스 공조체제하에 철저하게 수사가 진행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 수사는 어떻게 진행됐나
사건 발생후 3주쯤 지나 까르타 본부장을 만났는데 그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먼저 얘기를 꺼냈다. 프랑스의 모든 살인사건, 자살, 행려병자 중 사망한 시신을 철저히 조사했지만 김형욱과 유사한 시신은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수사를 더 해보겠지만 김형욱이 프랑스에서 빠져나간 것 같은 의심이 든다고 했다.
그러면서 까르타는 ‘깜짝 놀랄만한 한국 고위 외교관’을 소환해 조사했으며 조사 내용은 김형욱 사건의 방향을 설정하고 참고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외교관은 이상열 공사였다.
당초 수사본부는 이 공사를 두 차례 조사할 계획이었는데 본격적인 조사를 앞두고 이 공사가 서울로 가는 바람에 조사가 이뤄지지 않았다.
그 즈음 프랑스 대사관에 이상한 일이 있었다. 당시 민병기(작고) 대사가 대사관에 도둑이 들었다고 하더라. 그런데 대사관 방과 지하실을 모두 뒤진 흔적은 있는데 없어진 것은 양주 한 병뿐이어서 이상하다고 했다.
아마 프랑스 정보기관이 대사관이 개입한 혐의를 두고 김형욱을 찾기 위해 도둑으로 위장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공사를 소환 조사하고, 정보기관이 도둑을 가장해 대사관을 수색하자 이 공사를 한국으로 빼돌렸을 가능성이 크다.
어쨌든 당시 수사본부는 이 공사를 용의자로 지목하고 강도 높은 수사를 진행한 것으로 봐야 한다.
사건 발생 2주후 경시청을 찾았다가 김형욱 부인 등 가족을 만났는데 그들도 ‘이상열 공사에게 물어봐라. 다 알 것이다’고 하더라. 김형욱 부인도 수사본부에 이 공사를 지목했던 것 같다.
- 수사결과는 어땠나
4개월 후 까르타가 브리핑에 참석해줄 것을 요청했다. 브리핑 내용은 “4개월 동안 시신수색 등 철저한 수사를 했지만 김형욱은 생존해 있든 죽었든 파리에는 없다는 결론을 냈다”는 것이었다.
- 이상열 공사는 어떤 사람인가
김형욱 회고록을 검토한 중앙정보부는 이상열 전 프랑스 공사를 교섭창구로 삼았다. 이상열은 김형욱이 중정부장 시절 가장 신뢰하던 오른팔로 김형욱이 뉴욕에서 파리로 올 때마다 수행하면서 안내했던 인물이다.
사건발행 10일 후 모 일간지 특파원과 함께 이 공사를 만났다. 그는 사건 전날밤 12시까지 김형욱과 함께 있었다고 말했다. 당시 프랑스 도박장에서는 술과 음식이 공짜였는데 김형욱이 술을 많이 먹고 주정을 했다고 했다. 이 공사는 종업원이 김형욱을 수습하는 것을 보고 귀가했다고 주장했다. 이 공사와 있던 다음날 오전 11시 키 큰 동양인이 김형욱과 함께 도박장에 간다고 이야기 한 후 김형욱이 실종됐다. 이는 샹제리제 뒷골목에 있는 웨스트엔드 호텔 여종업원의 진술이다.
조선일보 보도 이후 기자들이 웨스트엔드 호텔로 달려갔을 때에도 김형욱의 소지품이 있었다.
나중에 김형욱이 과연 그 호텔에 갔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호텔 리츠에서 만취된 상태에서 납치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왜 그런 의문이 들었나
수사본부의 수사결과 발표 뒤인 80년 3월경 한 문서가 우편으로 배달됐다. 제목도 없이 유창한 불어로 김형욱 사건 개요가 나열된 문서에는 김형욱이 리츠호텔에서 한국정보기관원들에 의해 파리 15구 니꼬호텔 근처 한 아파트로 납치됐고, 일본 마담 소유의 이 아파트에서 마취된 김형욱이 다음날 외교행낭편으로 KAL기에 실려 서울로 압송됐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청와대 지하에서 총살됐다고 나와 있었다.
10여일이 지난 뒤 일본의 ‘주간문춘’에 동경특파원 발로 동일한 내용의 문서 사진과 함께 기사가 났다. 또 르몽드지도 동일한 내용을 발췌해 보도했다.
기사를 보고 당시 편집국장인 앙드레 퐁텐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된 내용이냐고 물었더니 “(출처가) 확실치 않은 보도는 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아마도 이 문서는 프랑스 정보기관이나 사건 전모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작성해 파리주재 특파원이나 언론인들에게 흘렸을 것으로 생각한다. 문서 내용이 이 공사가 했던 얘기와 유사했다.
- 국정원 진실위에서는 김형욱이 프랑스에서 살해됐다고 발표했는데
우선 김형욱 시신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프랑스 경시청에서 미·프랑스 정보기관의 협조를 받아 4개월이나 수사했다. 낙엽에 덮여 버려진 시체가 나오지 않았다는게 이해가 되나.
또 김형욱을 직접 살해했다는 동유럽인도 가공인물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당시는 프랑스가 냉전의 한복판이었다. 동유럽인이 한국 유학생에게 포섭됐다는 것은 상식 이하다.
당시 정황상 동양인 부탁이 들어왔다면 즉시 신고했을 것이다. 만약 그게 사실이었다 해도 시간이 지나 폭로하는 것이 유럽인의 성격상 고백이 있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 프랑스 내 양계장에서 살해됐다는 주장도 있는데
양계장에서 살해했다는 것도 상식밖 주장이다. 양계장 분쇄기를 이용하려면 주인이나 종업원의 공모가 있어야 가능하다. 프랑스 사람들 특성상 즉시 경시청에 신고했을 것이다.
- 김형욱 실종사건의 의혹을 없애기 위해서는 어떤 조사가 필요하다고 보나
우선 프랑스 수사당국의 협조를 얻어 수사기록을 넘겨받고 현장조사를 반드시 해야한다고 본다. 당시 프랑스에서 미국의 협조를 얻어 철저하게 수사했다. 광범위한 자료를 갖고 있을 것이다. 73년도 파리특파원 당시 개인 운전면허 기록까지 갖고 있더라. 4개월간이나 수사를 진행했으니 기록이 잘 보존돼 있으리라 생각한다.
이상열 공사에 대해서도 철저한 조사가 필요하다. 김형욱이 납치 후 총살됐다면 이 공사는 암살공작 주모자에 해당한다. 반드시 고백을 받아내야 한다.
프랑스의 살인죄 시효는 10년이지만 반인도 범죄는 실효가 없다. 향후 프랑스가 이 공사에 대해 범인인도요청을 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국정원은 철저히 조사해야한다고 본다.
/김기수·구본홍 기자 bhkoo@naeil.com
주섭일 전 프랑스 특파원은 누구
취재와 연구 겸한 ‘프랑스통’
김형욱 실종사건에 대한 당시 프랑스 경시청의 수사내용을 소개한 주섭일 전 특파원 은 국내에서 몇 안되는 ‘프랑스통’이자 ‘유럽통’이다.
서울대 불어불문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신문, 중앙일보 기자로 근무한 주 전 특파원은 1972년부터 프랑스 특파원을 역임했고, 87년에는 프랑스 파리 제13대학에서 정치학 박사를 받았다. 또 지난 95년에는 프랑스 파리외교전략대학원 최고지도자과정을 수료하기도 했다.
프랑스에 대한 오랜 취재와 연구가 밑받침이 돼 주 전 특파원은 프랑스와 유럽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89년 세계일보 유럽총국장, 96년 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를 맡았던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주 전 특파원은 기사 외에도 ‘프랑스혁명과 한말변혁운동’ ‘소련 오해받고 있다’ ‘한지붕 유럽 그리고 분단한국’ ‘지도자와 역사의식’ ‘프랑스의 대숙청’ 등 저서를 통해 프랑스와 유럽에 대한 식견을 보여준 바 있다.
주 전 특파원은 98년 참여연대 고문, 2000년 내일신문 주필, 2002년 경원대 신문방송학과 겸임교수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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