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오적의 하나인 이완용의 생가 터가 판교신도시 아파트부지로 편입되면서 향토사학자 등 지역내 문화계 인사들이 학술회의를 준비하는 등 처리방안에 신중을 기하고 있다.
이러한 가운데 성남시 구청장 출신의 김상희씨는 최근 “조선시대에는 역적이 태어난 집터에 또 다른 역적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연못을 판 것으로 알고 있다”며 연못 조성을 제안해 관심을 끌고 있다.
김씨는 “후손들에게 매국노의 말로가 이렇게 된다는 교훈을 남기기 위해 단순히 표적만 세우는 것보다는 확실한 징표를 만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며 이같이 제안했다. 또 연못을 파고 주변을 조경해 관광지로 만들면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고려대 한국사학과 조 광 교수는 “역적이 태어난 집을 부수고 그 자리에 연못을 판 것은 조선시대 형벌의 일종으로 ‘파가저택(破家
)’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1801년 천주교신자 유항검이 신유박해로 처형되고 난 뒤 전주 초남리(지금의 전주시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14-1)의 집터에 연못을 판 사실을 파가저택의 예로 들었다.
정조실록에도 조선후기 문신이었던 김하재가 죽자 ‘가산이 적몰되고 파가저택 되었으며’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에 대해 ‘이완용 평전’의 저자인 윤덕한씨는 “매국노의 집터를 화려하게 치장할 필요는 없지만 후세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기 위해 표석 설치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성남시 양인권 부시장도 “아프고 부정적인 역사도 역사인 만큼 사실 그 자체를 후세에 알릴 필요가 있다”며 “이완용의 생가 터에 작은 표석을 세우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남선우 성남문화원장은 “이완용 생가 터는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추정된 것으로 아직 고증작업을 거치지 않았다”며 “철저한 고증을 거쳐 합리적 처리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남 원장은 “이를 위해 11월경 역사학자·향토사학자 등과 함께 학술회의를 준비중”이라며 신중하게 접근할 뜻을 밝혔다.
이완용 생가 터에 대한 고증 절차와 관련, 윤덕한씨는 이완용의 생질 김명수가 이완용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인 ‘일당기사’(1927년 발행)를 인용해 “이완용이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서 태어난 것은 확실해 보인다”고 말했다.
또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이 2001년 성남시 의뢰를 받아 작성한 ‘성남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보고서에는 이완용 생가를 분당구 백현동 221 또는 223으로 표기해 놓고 ‘현재의 생가는 백현동 아랫말 뒷가게인 이모씨의 집으로, 옛 집은 헐리고 새로 지은 것이다’고 적어 놓았다. 당시 조사에 참여했던 토지박물관 김주홍 학예사는 “원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생가 터를 알아냈으며 지번은 정확하지 않으나 사진 촬영한 가옥은 이완용의 집터가 확실하다”고 말했다.
성남시는 “토지박물관이 조사한 생가의 소재지는 백현동 226의 1번지로 확인되었으며 한국전쟁 때 소실된 뒤 다시 신축해 최근까지 이모씨가 살았으나 판교개발부지로 편입되면서 이달초에 헐렸다”고 밝혔다.
정중완 문화예술과장은 “이완용 생가 터는 주택공사 사업시행구역내 공동주택용지로 지정돼 아파트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라며 “성남문화원과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주공과 처리방안을 협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성남 황인혁 기자 ihhwang@naeil.com
이완용(1858∼1926)은?
호는 일당. 우봉 이씨 집안의 가난한 선비 이석준의 아들로 태어나 열 살 때인 1867년 4월 20일 당시 예방승지(청와대 의전비서관격)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갔다. 1882년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지 주서가 된 뒤 1888년 주미대리공사 1891년 형조참판 1898년 전북관찰사 등 관직을 두루 지냈다.
1898년 2월 독립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으나 그해 7월 곧바로 협회에서 제명당했으며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해 을사오적이 되었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이던 그는 일본 데라우치 통감과 한일합병 조약을 체결해 같은 달 29일 나라를 일제에게 넘겨주었다.
조약 체결 뒤인 1910년 10월 일본 천황으로부터 백작 작위와 함께 잔무처리수당 60여원과 퇴직금 1458원 33전을 받았다. 당대의 명필로 독립문의 현판을 썼다는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기도 했다. 1926년 2월 11일 서울 옥인동 자택에서 숨진 뒤 전북 익산에 묻혀 있다.
이러한 가운데 성남시 구청장 출신의 김상희씨는 최근 “조선시대에는 역적이 태어난 집터에 또 다른 역적이 태어나지 못하도록 연못을 판 것으로 알고 있다”며 연못 조성을 제안해 관심을 끌고 있다.
김씨는 “후손들에게 매국노의 말로가 이렇게 된다는 교훈을 남기기 위해 단순히 표적만 세우는 것보다는 확실한 징표를 만드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며 이같이 제안했다. 또 연못을 파고 주변을 조경해 관광지로 만들면 지역경제에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 고려대 한국사학과 조 광 교수는 “역적이 태어난 집을 부수고 그 자리에 연못을 판 것은 조선시대 형벌의 일종으로 ‘파가저택(破家
)’이라고 한다”고 말했다.
조 교수는 1801년 천주교신자 유항검이 신유박해로 처형되고 난 뒤 전주 초남리(지금의 전주시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14-1)의 집터에 연못을 판 사실을 파가저택의 예로 들었다.
정조실록에도 조선후기 문신이었던 김하재가 죽자 ‘가산이 적몰되고 파가저택 되었으며’라는 기록이 남아있다.
이에 대해 ‘이완용 평전’의 저자인 윤덕한씨는 “매국노의 집터를 화려하게 치장할 필요는 없지만 후세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주기 위해 표석 설치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성남시 양인권 부시장도 “아프고 부정적인 역사도 역사인 만큼 사실 그 자체를 후세에 알릴 필요가 있다”며 “이완용의 생가 터에 작은 표석을 세우는 방안을 검토중”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남선우 성남문화원장은 “이완용 생가 터는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추정된 것으로 아직 고증작업을 거치지 않았다”며 “철저한 고증을 거쳐 합리적 처리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남 원장은 “이를 위해 11월경 역사학자·향토사학자 등과 함께 학술회의를 준비중”이라며 신중하게 접근할 뜻을 밝혔다.
이완용 생가 터에 대한 고증 절차와 관련, 윤덕한씨는 이완용의 생질 김명수가 이완용의 일대기를 기록한 책인 ‘일당기사’(1927년 발행)를 인용해 “이완용이 1858년 6월 7일 경기도 광주군 낙생면 백현리에서 태어난 것은 확실해 보인다”고 말했다.
또 한국토지공사 토지박물관이 2001년 성남시 의뢰를 받아 작성한 ‘성남시의 역사와 문화유적’ 보고서에는 이완용 생가를 분당구 백현동 221 또는 223으로 표기해 놓고 ‘현재의 생가는 백현동 아랫말 뒷가게인 이모씨의 집으로, 옛 집은 헐리고 새로 지은 것이다’고 적어 놓았다. 당시 조사에 참여했던 토지박물관 김주홍 학예사는 “원주민들의 증언을 토대로 생가 터를 알아냈으며 지번은 정확하지 않으나 사진 촬영한 가옥은 이완용의 집터가 확실하다”고 말했다.
성남시는 “토지박물관이 조사한 생가의 소재지는 백현동 226의 1번지로 확인되었으며 한국전쟁 때 소실된 뒤 다시 신축해 최근까지 이모씨가 살았으나 판교개발부지로 편입되면서 이달초에 헐렸다”고 밝혔다.
정중완 문화예술과장은 “이완용 생가 터는 주택공사 사업시행구역내 공동주택용지로 지정돼 아파트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라며 “성남문화원과 시민들의 의견을 수렴해 주공과 처리방안을 협의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성남 황인혁 기자 ihhwang@naeil.com
이완용(1858∼1926)은?
호는 일당. 우봉 이씨 집안의 가난한 선비 이석준의 아들로 태어나 열 살 때인 1867년 4월 20일 당시 예방승지(청와대 의전비서관격) 이호준의 양자로 들어갔다. 1882년 증광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지 주서가 된 뒤 1888년 주미대리공사 1891년 형조참판 1898년 전북관찰사 등 관직을 두루 지냈다.
1898년 2월 독립협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으나 그해 7월 곧바로 협회에서 제명당했으며 1905년 11월 17일 을사조약 체결을 주도해 을사오적이 되었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이던 그는 일본 데라우치 통감과 한일합병 조약을 체결해 같은 달 29일 나라를 일제에게 넘겨주었다.
조약 체결 뒤인 1910년 10월 일본 천황으로부터 백작 작위와 함께 잔무처리수당 60여원과 퇴직금 1458원 33전을 받았다. 당대의 명필로 독립문의 현판을 썼다는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기도 했다. 1926년 2월 11일 서울 옥인동 자택에서 숨진 뒤 전북 익산에 묻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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