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속기획 - 대한민국 ‘산’, 오늘과 내일
<1> 60년만에 민둥산을 숲으로 바꿔 <사진>
한국 녹색의 신화, 몽골 사막에서 재현
온 나라가 ‘나무심기’ 매달려 60년만에 산림밀도 24배 증가
민둥산 천지 오명 벗고 ‘황무지 조림법’ 사막지대에 전수
‘대한민국 산림의 역사’는 불가능과 싸운 시간이었다. 환경분야 세계적 저술가인 미국의 레스터 브라운 지구정책연구소장은 “한국처럼 지구도 다시 푸르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매년 서울 남산의 17배에 달하는 산림이 사라지고 있다. 내일신문은 산림청과 공동으로 우리나라 산림의 실태와 산림정책의 전망을 살펴보는 기획을 시작한다. <편집자 주="">
어리석지만 우직한 90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우공이산’은 빈말이 아니었다. 헐벗은 민둥산을 사철 푸른 숲으로 바꾼 60여년의 시간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일제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피폐된 우리 산림은 1970년대 후반까지도 회생의 기미가 요원했다. 그러나 정부의 강력한 녹화정책과 국민의 참여, 밤낮을 가리지 않은 관계자들의 희생으로 녹화정책 30여년만에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전 국토의 녹화사업은 한반도를 넘어 중국, 몽골, 동남아, 아프리카 까지 확대되고 있다.
중국과 몽골을 비롯해 동남아와 아프리카, 우즈베키스탄 등 세계 각국에서 우리의 조림성공 사례를 주목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봄철 황사의 50%가 날아오는 몽골 고비사막에 산림청이 직접 참여해 2016년까지 3000㏊의 사막화방지 조림사업을 수행한다.
또 중국 서부지역 사막화방지 조림사업에도 참여하고 있고, 인도네시아에는 50만㏊의 조림지를 확보해 2008년부터 조림사업을 펼칠 예정이다.
서승진 산림청장은 “해외 조림사업은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렵지만 우리나라의 성공모델을 제시하고 국제사회의 동참을 촉구하는 효과가 있다”며 “한국의 사례가 몽골의 사막을 울창한 숲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국가 혼란기에 산림 초토화
우리나라 산림은 19세기까지 천연림에 가까운 울창한 노령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일제치하와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황폐화돼 1960년 ㏊당 전국평균 임목축적은 10.6㎥에 불과했다.
특히 일제시대에는 사실상 우리나라 산림의 근간이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는 식민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산림공유제에서 국유림 공유림 사유림 등 소유제를 도입했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개국과 함께 ‘산림천택여민공지’라는 원칙을 적용, 공유제를 원칙으로 해왔다. 김연표 임우회장은 “당시 조선총독부의 일반회계 재원 80%를 토지세와 재산세로 충당했는데, 일제가 재원마련을 위해 산림을 사유화해 세금을 거둬들였다”고 주장했다. 산림 사유제가 일제의 수탈정책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1927~1941년 사이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국유림 지역에서 31~45.5%의 입목축적이 줄어든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 이 지역 산림의 약 50%가 파괴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재향군인회가 조선에 설립한 조선임업개발주식회사가 경북 봉화·울진 일대에서 금강소나무를 8년간 싹쓸이하다시피 베어낸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해방 이후 6·25 전쟁을 겪으면서 우리 산림은 치유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정부가 1967년 36만4000㏊의 연료림을 조성하고 1968년부터 1972년까지 15만㏊의 보완조림을 실시했음에도 1973년 입목축적이 11.3㎥(1960년 10.6㎥)에 불과한 것을 보면 1960년대 우리 산림이 얼마나 황폐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산림청 출범과 국토녹화의 시작
땔감을 공급하기 위한 연료림 조성에서 큰 성과를 거둔 정부는 농림부 산림국을 정점으로 본격적인 국토녹화에 착수한다. 정부는 나무심기와 함께 당시 만연해 있던 도벌에 대한 대대적 단속에 들어간다. 벌채허가권이 웃돈이 얹혀 매매되고 권력기관과 결탁한 기업형 도벌이 횡행했다. 이 사이 1964년 10월 지리산 일대에서 사상 최대 도벌조직이 적발됐다. 지리산 백무동 골짜기에 10㎞에 이르는 도로와 천왕봉 인근 제석봉 구상나무림의 타다 남은 흔적이 모두 도벌의 영향이다.
1967년 1월 산림청이 출범하면서 전 국토에 나무 심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매월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두 달 동안은 전국의 모든 농촌마을 한 집에서 한 사람씩 나무심기에 참여해야 했다. ‘부역’ 제도를 둬 무임금 노동봉사라는 강력한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황폐화된 토양은 나무가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무너져 내리기 일쑤였다. 김연표 회장은 “나무를 심어야 할 땅의 3분의 2가 흙이 쏟아지지 않도록 토목공사부터 해야 할 형편이었다”고 회고했다.
1967년 출범한 산림청은 1973년 농림부 소속에서 내무부 소속으로 바뀌며 산림정책의 새로운 전환을 맞는다. 전국 시·군이 산림녹화에 참여하고 경찰조직을 통해 산림을 보호한다는 취지였다. 정부는 이때 1982년까지 100만㏊의 조림을 통해 전국의 산지를 녹화한다는 ‘1차 치산녹화 10년 계획’을 발표했다. 1973년 봄철에만 전국적으로 11만㏊에 2억9700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기염을 토했다.
국토녹화 사업은 매 10년 단위로 주요 목표를 바꿔 진행되고 있고 올해 제4차 기본계획은 ‘산림경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처럼 범국가사업으로 진행된 국토녹화사업은 세계 유례가 없는 일로 본격적인 사업개시 30여년 만에 전국의 민둥산을 숲으로 바꾸는 기적을 일궈냈다. 세계은행(IBRD)에서 차관으로 돈을 빌려 나무를 심어 한때 국제사회의 의심을 사기도 했다. 미국의 유명 방송사가 현지 취재를 통해 실태를 보도하기도 했다.
나무연령 30년 미만 대부분, 지속관리 절실
2006년말 우리나라 산림율은 64%로 핀란드(74%) 일본(68%) 스웨덴(67%)에 이어 OECD국가 30개국 중 4위에 해당한다. 산림에 있는 나무총량(임목축적. 산림의 울창한 정도)은 약 5억2583만㎥로, ㏊당 평균 82.3㎥다. 이는 식목일 제정원년(1946년) 3.5㎥보다 24배, 치산녹화 원년(1973년) 11.3㎥보다 7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임업선진국인 일본(171㎥) 독일(268㎥) 스위스(368㎥)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지만 1970년대 초까지 전국 산이 민둥산이었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발전이다.
그러나 정부주도의 강력한 정책에 따라 단기간에 이뤄진 국토녹화는 이후 관리대책이 절실한 형편이다. 30년이 채 안된 숲이 전체의 59%로 집중적인 산림관리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30년생 이하 나무가 전체의 59%를 차지하고 있다.
이명환·김신일 기자 mhan@naeil.com
<사이드 박스="">
숲 조성에 인생을 건 사람들
임종국(1987년 사망) 선생은 나무심기에 인생을 걸었다. 전북 순창이 고향인 임 선생은 1956년 전남 장성군 덕진리의 인촌 김성수 선생 소유의 산에 빽빽이 들어찬 삼나무와 편백 숲을 보고 나무심기에 인생을 걸었다.
개인 소유지는 물론 국유지를 빌려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주변에서 한 해 동안 30㏊가 넘는 산에 나무를 심는 등 20년 동안 569㏊, 253만여 그루의 편백·삼나무를 심어 명품숲을 조성했다.
68~69년 극심한 가뭄 때 사나흘을 쉬지 않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물지게를 나르는 모습에 지역 주민들이 동참한 사연은 지금도 지역사회의 일화로 전해진다.
임씨가 조성한 숲은 국내 최대 난대수종 조림지로 2000년 산림청이 선정한 ‘22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숲’에 선정되기도 했다. 임씨는 1987년 72세의 일기로 사망했고, 지난 2005년에는 고향땅에서 숲으로 돌아와 인생을 걸고 조성한 나무들과 함께 하고 있다.
산림청은 임씨 사후 이 숲이 경영관리 부실 등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서부지방산림청 주도로 대대적인 숲가꾸기 사업과 함께 매수작업을 펼쳐 지난 2002년 4월 국유림으로 전환했다.
임종국 선생 외에도 전남 강진군에 1000㏊의 숲을 조림한 초당약품 김기운 회장, 경기도 양평의 이규현 독림가 등이 평생을 나무심기에 바친 인물들이다.
이명환 기자
<인터뷰>
인터뷰 - 산림 역사의 산 증인 김연표 임우회장
“전국 방방곡곡 사연 없는 숲이 없다”
김연표(75·사진) 임우회장은 25년을 산림청에서 일했고, 70년대 가장 활발했던 산림녹화 사업을 이끈 장본인이다. 그는 “60년 만에 민둥산을 울창한 숲으로 바꿔놓은, 세계에 유래 없는 기적을 일구는 과정에는 말로 다하지 못할 숱한 애환이 묻어있다”며 지난 일을 회고했다. 대관령은 연중 바람이 심해 나무가 살지 못하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심은 나무마다 싸리나 대나무로 발을 만들어 바람을 막는 것이었다. 70년대에 이렇게 발을 만들어 세운 면적만 수십㏊다. 곳곳에 방풍책도 세웠다. 결국 조림에 성공, 지금의 울창한 대관령을 만들었다.
포항 영일만 일대는 일본서 비행기로 들어오면서 보이는 첫 관문으로, 역시 조림이 꼭 필요했던 곳이다. 해안선은 깎아지른 듯한 절개면이었다. 이곳에 로프를 타고 절벽을 내려가 매달려서 바위를 찍어가며 나무를 심었다.
충남 아산의 현충사 녹화는 전국에서 소나무를 기증받아 조경을 했는데 소나무에 치명적인 솔잎혹파리가 생긴 것. 당시 충남도 공무원들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2~3㏊나 되는 솔밭에 모두 비닐을 깔았다. 당시는 농사용 비닐도 구하기 힘들 때였다. 솔잎혹파리는 날씨가 추워지면 땅으로 내려와 동면한다. 비닐을 깔아둔 덕에 날씨가 추워지면서 바닥으로 내려온 솔잎혹파리를 바가지로 퍼 냈다.
김 회장은 “산림녹화는 성공했지만 아직 경제·문화적 가치를 발휘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또 “어느 정도 산림녹화가 이루어지자 지자체에 있는 산림국과 산림과가 없어지고, 전문인력도 줄어들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가 산림청을 산림부로 승격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 회장은 57년 기술고시로 공직에 발 디딘 후 67년 산림청 개청과 함께 초대 보호과장을 역임했다. 73년 1차 치산녹화 10년 계획이 세워지면서 청와대로 파견, 이 사업을 이끌었다. 87년부터 92년까지 6년간 산림청 차장으로 근무하다 퇴임했다. 지금은 퇴임 임업직 공무원들의 모임인 임우회 회장과 민간단체인 임업사랑시민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김신일 기자 ddhn21@naeil.com
Copyright ⓒThe Naeil News. All rights reserved.
인터뷰>사이드>편집자>사진>1>
<1> 60년만에 민둥산을 숲으로 바꿔 <사진>
한국 녹색의 신화, 몽골 사막에서 재현
온 나라가 ‘나무심기’ 매달려 60년만에 산림밀도 24배 증가
민둥산 천지 오명 벗고 ‘황무지 조림법’ 사막지대에 전수
‘대한민국 산림의 역사’는 불가능과 싸운 시간이었다. 환경분야 세계적 저술가인 미국의 레스터 브라운 지구정책연구소장은 “한국처럼 지구도 다시 푸르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매년 서울 남산의 17배에 달하는 산림이 사라지고 있다. 내일신문은 산림청과 공동으로 우리나라 산림의 실태와 산림정책의 전망을 살펴보는 기획을 시작한다. <편집자 주="">
어리석지만 우직한 90 노인이 산을 옮긴다는 ‘우공이산’은 빈말이 아니었다. 헐벗은 민둥산을 사철 푸른 숲으로 바꾼 60여년의 시간이 이를 잘 보여준다.
일제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피폐된 우리 산림은 1970년대 후반까지도 회생의 기미가 요원했다. 그러나 정부의 강력한 녹화정책과 국민의 참여, 밤낮을 가리지 않은 관계자들의 희생으로 녹화정책 30여년만에 서서히 제 모습을 찾아가고 있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 힘든 전 국토의 녹화사업은 한반도를 넘어 중국, 몽골, 동남아, 아프리카 까지 확대되고 있다.
중국과 몽골을 비롯해 동남아와 아프리카, 우즈베키스탄 등 세계 각국에서 우리의 조림성공 사례를 주목하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봄철 황사의 50%가 날아오는 몽골 고비사막에 산림청이 직접 참여해 2016년까지 3000㏊의 사막화방지 조림사업을 수행한다.
또 중국 서부지역 사막화방지 조림사업에도 참여하고 있고, 인도네시아에는 50만㏊의 조림지를 확보해 2008년부터 조림사업을 펼칠 예정이다.
서승진 산림청장은 “해외 조림사업은 단기간에 성과를 내기 어렵지만 우리나라의 성공모델을 제시하고 국제사회의 동참을 촉구하는 효과가 있다”며 “한국의 사례가 몽골의 사막을 울창한 숲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국가 혼란기에 산림 초토화
우리나라 산림은 19세기까지 천연림에 가까운 울창한 노령림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와 일제치하와 1950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황폐화돼 1960년 ㏊당 전국평균 임목축적은 10.6㎥에 불과했다.
특히 일제시대에는 사실상 우리나라 산림의 근간이 무너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제는 식민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산림공유제에서 국유림 공유림 사유림 등 소유제를 도입했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 개국과 함께 ‘산림천택여민공지’라는 원칙을 적용, 공유제를 원칙으로 해왔다. 김연표 임우회장은 “당시 조선총독부의 일반회계 재원 80%를 토지세와 재산세로 충당했는데, 일제가 재원마련을 위해 산림을 사유화해 세금을 거둬들였다”고 주장했다. 산림 사유제가 일제의 수탈정책 일환이었다는 것이다.
1927~1941년 사이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 국유림 지역에서 31~45.5%의 입목축적이 줄어든 것이 이를 잘 보여준다. 당시 이 지역 산림의 약 50%가 파괴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재향군인회가 조선에 설립한 조선임업개발주식회사가 경북 봉화·울진 일대에서 금강소나무를 8년간 싹쓸이하다시피 베어낸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해방 이후 6·25 전쟁을 겪으면서 우리 산림은 치유하기 어려운 상황에 빠졌다.
정부가 1967년 36만4000㏊의 연료림을 조성하고 1968년부터 1972년까지 15만㏊의 보완조림을 실시했음에도 1973년 입목축적이 11.3㎥(1960년 10.6㎥)에 불과한 것을 보면 1960년대 우리 산림이 얼마나 황폐했는지 잘 알 수 있다.
산림청 출범과 국토녹화의 시작
땔감을 공급하기 위한 연료림 조성에서 큰 성과를 거둔 정부는 농림부 산림국을 정점으로 본격적인 국토녹화에 착수한다. 정부는 나무심기와 함께 당시 만연해 있던 도벌에 대한 대대적 단속에 들어간다. 벌채허가권이 웃돈이 얹혀 매매되고 권력기관과 결탁한 기업형 도벌이 횡행했다. 이 사이 1964년 10월 지리산 일대에서 사상 최대 도벌조직이 적발됐다. 지리산 백무동 골짜기에 10㎞에 이르는 도로와 천왕봉 인근 제석봉 구상나무림의 타다 남은 흔적이 모두 도벌의 영향이다.
1967년 1월 산림청이 출범하면서 전 국토에 나무 심는 운동이 대대적으로 펼쳐졌다. 매월 3월 1일부터 4월 30일까지 두 달 동안은 전국의 모든 농촌마을 한 집에서 한 사람씩 나무심기에 참여해야 했다. ‘부역’ 제도를 둬 무임금 노동봉사라는 강력한 정책을 펼치기도 했다.
그러나 당시 황폐화된 토양은 나무가 뿌리를 내리기도 전에 무너져 내리기 일쑤였다. 김연표 회장은 “나무를 심어야 할 땅의 3분의 2가 흙이 쏟아지지 않도록 토목공사부터 해야 할 형편이었다”고 회고했다.
1967년 출범한 산림청은 1973년 농림부 소속에서 내무부 소속으로 바뀌며 산림정책의 새로운 전환을 맞는다. 전국 시·군이 산림녹화에 참여하고 경찰조직을 통해 산림을 보호한다는 취지였다. 정부는 이때 1982년까지 100만㏊의 조림을 통해 전국의 산지를 녹화한다는 ‘1차 치산녹화 10년 계획’을 발표했다. 1973년 봄철에만 전국적으로 11만㏊에 2억9700만 그루의 나무를 심는 기염을 토했다.
국토녹화 사업은 매 10년 단위로 주요 목표를 바꿔 진행되고 있고 올해 제4차 기본계획은 ‘산림경영’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처럼 범국가사업으로 진행된 국토녹화사업은 세계 유례가 없는 일로 본격적인 사업개시 30여년 만에 전국의 민둥산을 숲으로 바꾸는 기적을 일궈냈다. 세계은행(IBRD)에서 차관으로 돈을 빌려 나무를 심어 한때 국제사회의 의심을 사기도 했다. 미국의 유명 방송사가 현지 취재를 통해 실태를 보도하기도 했다.
나무연령 30년 미만 대부분, 지속관리 절실
2006년말 우리나라 산림율은 64%로 핀란드(74%) 일본(68%) 스웨덴(67%)에 이어 OECD국가 30개국 중 4위에 해당한다. 산림에 있는 나무총량(임목축적. 산림의 울창한 정도)은 약 5억2583만㎥로, ㏊당 평균 82.3㎥다. 이는 식목일 제정원년(1946년) 3.5㎥보다 24배, 치산녹화 원년(1973년) 11.3㎥보다 7배 이상 증가한 수치다. 임업선진국인 일본(171㎥) 독일(268㎥) 스위스(368㎥)에 비하면 낮은 수준이지만 1970년대 초까지 전국 산이 민둥산이었던 것에 비하면 놀라운 발전이다.
그러나 정부주도의 강력한 정책에 따라 단기간에 이뤄진 국토녹화는 이후 관리대책이 절실한 형편이다. 30년이 채 안된 숲이 전체의 59%로 집중적인 산림관리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30년생 이하 나무가 전체의 59%를 차지하고 있다.
이명환·김신일 기자 mhan@naeil.com
<사이드 박스="">
숲 조성에 인생을 건 사람들
임종국(1987년 사망) 선생은 나무심기에 인생을 걸었다. 전북 순창이 고향인 임 선생은 1956년 전남 장성군 덕진리의 인촌 김성수 선생 소유의 산에 빽빽이 들어찬 삼나무와 편백 숲을 보고 나무심기에 인생을 걸었다.
개인 소유지는 물론 국유지를 빌려 장성군 서삼면 모암리 주변에서 한 해 동안 30㏊가 넘는 산에 나무를 심는 등 20년 동안 569㏊, 253만여 그루의 편백·삼나무를 심어 명품숲을 조성했다.
68~69년 극심한 가뭄 때 사나흘을 쉬지 않고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물지게를 나르는 모습에 지역 주민들이 동참한 사연은 지금도 지역사회의 일화로 전해진다.
임씨가 조성한 숲은 국내 최대 난대수종 조림지로 2000년 산림청이 선정한 ‘22세기를 위해 보존해야 할 아름다운 숲’에 선정되기도 했다. 임씨는 1987년 72세의 일기로 사망했고, 지난 2005년에는 고향땅에서 숲으로 돌아와 인생을 걸고 조성한 나무들과 함께 하고 있다.
산림청은 임씨 사후 이 숲이 경영관리 부실 등으로 사라질 위기에 처하자 서부지방산림청 주도로 대대적인 숲가꾸기 사업과 함께 매수작업을 펼쳐 지난 2002년 4월 국유림으로 전환했다.
임종국 선생 외에도 전남 강진군에 1000㏊의 숲을 조림한 초당약품 김기운 회장, 경기도 양평의 이규현 독림가 등이 평생을 나무심기에 바친 인물들이다.
이명환 기자
<인터뷰>
인터뷰 - 산림 역사의 산 증인 김연표 임우회장
“전국 방방곡곡 사연 없는 숲이 없다”
김연표(75·사진) 임우회장은 25년을 산림청에서 일했고, 70년대 가장 활발했던 산림녹화 사업을 이끈 장본인이다. 그는 “60년 만에 민둥산을 울창한 숲으로 바꿔놓은, 세계에 유래 없는 기적을 일구는 과정에는 말로 다하지 못할 숱한 애환이 묻어있다”며 지난 일을 회고했다. 대관령은 연중 바람이 심해 나무가 살지 못하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심은 나무마다 싸리나 대나무로 발을 만들어 바람을 막는 것이었다. 70년대에 이렇게 발을 만들어 세운 면적만 수십㏊다. 곳곳에 방풍책도 세웠다. 결국 조림에 성공, 지금의 울창한 대관령을 만들었다.
포항 영일만 일대는 일본서 비행기로 들어오면서 보이는 첫 관문으로, 역시 조림이 꼭 필요했던 곳이다. 해안선은 깎아지른 듯한 절개면이었다. 이곳에 로프를 타고 절벽을 내려가 매달려서 바위를 찍어가며 나무를 심었다.
충남 아산의 현충사 녹화는 전국에서 소나무를 기증받아 조경을 했는데 소나무에 치명적인 솔잎혹파리가 생긴 것. 당시 충남도 공무원들이 이를 해결하기 위해 2~3㏊나 되는 솔밭에 모두 비닐을 깔았다. 당시는 농사용 비닐도 구하기 힘들 때였다. 솔잎혹파리는 날씨가 추워지면 땅으로 내려와 동면한다. 비닐을 깔아둔 덕에 날씨가 추워지면서 바닥으로 내려온 솔잎혹파리를 바가지로 퍼 냈다.
김 회장은 “산림녹화는 성공했지만 아직 경제·문화적 가치를 발휘하기에는 갈 길이 멀다”고 말했다. 또 “어느 정도 산림녹화가 이루어지자 지자체에 있는 산림국과 산림과가 없어지고, 전문인력도 줄어들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가 산림청을 산림부로 승격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김 회장은 57년 기술고시로 공직에 발 디딘 후 67년 산림청 개청과 함께 초대 보호과장을 역임했다. 73년 1차 치산녹화 10년 계획이 세워지면서 청와대로 파견, 이 사업을 이끌었다. 87년부터 92년까지 6년간 산림청 차장으로 근무하다 퇴임했다. 지금은 퇴임 임업직 공무원들의 모임인 임우회 회장과 민간단체인 임업사랑시민연대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
김신일 기자 ddhn21@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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