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문)에티오피아

지역내일 2007-09-19
에티오피아- 신비와 불굴의 역사 3천년

정병국 대사

우리나라 사람들이 에티오피아로부터 먼저 떠올리는 영상은 무엇일까? 가장 먼저 연상하는 것이 1980-90년대의 비참한 기아이고, 다음이 맨발의 마라톤 세계 금메달리스트 아베베와 1960년대 한국을 방문하였던 하일레 셀라시에 황제 정도이다. 그보다 조금 더 나아가 에티오피아가 커피의 원산지이며, 1950년대 초 한국전쟁 당시 병력을 파견하여 한반도의 적화를 막는 데 기여하였던 혈맹 우방이라고까지 아는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러나 에티오피아가 3천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기독교(동방정교) 국가로서
수많은 외침에 저항하며 아프리카 53개국 중 유일하게 식민지화를 모면하고 면면히 독립국을 유지해오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지 않다.
에티오피아란 “태양에 그을린 얼굴의 땅(Land of burnt faces)”이라는 의미라고 하며, 구전에 의하면, 시바(Sheba) 여왕이 예루살렘으로 솔로몬 왕(기원전 970-931년 생존 추정)을 찾아가 얻은 아들 메넬릭 1세(Menelik I)가 악숨(Axum) 왕국을 건국함으로써 에티오피아 왕국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당시 시바는 현재의 에티오피아 북부와 예멘 지역을 다스렸다고 하며, 그래서 에티오피아 인들은 시바를 자신들의 시조로 간주하고, 예멘 인들도 같은 주장을 하고 있다. 시바가 일단 예루살렘에서 악숨(오늘날 에티오피아 북단 유적지)으로 귀환한 후 메넬릭 1세를 출산하여, 그가 20세 되던 해에 다시 예루살렘의 부친 솔로몬에게 보내었으나, 솔로몬은 아들에 대한 자신의 각별한 애정을 시기한 주변 신하들(당시에는 성직자들)의 성화에 못 이겨 얼마 안 되어 아들을 악숨으로 되돌려 보내었다고 한다. 솔로몬왕은 아들을 축출하라는 신하들의 요구를 들어 주는 대신, 각 신하들의 장자가 왕자를 수행토록 한다는 조건을 제시하였는데, 이 때 수행원 한 사람이 예루살렘 성전에 보관되어 있던 십계명 법궤(Ark of the Covenant)를 훔쳐와 현재 악숨의 시온 성 마리아 교회(Church of St. Mary of Zion)에 안장되어 있다고 전한다. 4천 년 전 모세가 에티오피아 여인 세포라(Sephora)를 우물가에서 만나, 부인으로 삼았다는 설까지 있다.
악숨 왕국을 포함한 에티오피아는 종교적, 문화적으로 그리스와 이집트로부터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악숨 왕국은 2천 년 전부터 그리스 상인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었으며, 에티오피아 정교(Ethiopian Orthodox)도 물론 그리스 정교로부터 기원한다. 에티오피아 교회의 성경은 게에쯔(Ge''ez)라는 고대 그리스어로 되어 있다. 에티오피아는 고대 이집트 왕국에 각종 물자를 조달하는 기지 역할을 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석탑(Obelisk or stele)을 포함한 이집트 문화가 도입된 것으로 전해진다. 종교적으로도, 에티오피아 정교는 이집트 콥틱(Coptic) 교회에서 갈라져 나온 지파의 하나로서, 1959년까지만 하여도 알렉산드리아(Alexandria) 콥틱 교회의 총대주교가 주교 1명을 에티오피아로 파송하였다고 한다.
이 같은 정황에 비추어, 에티오피아는 종교, 문화, 역사적으로 이스라엘, 이집트 및 그리스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은 틀림없다. 악숨 왕조는 13세기 경 패망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왕조 후반에 해당하는 6세기부터 19세기 말까지 에티오피아는 교리상 차이로 인해 서구 기독교(프로테스탄트) 문화와 단절된 채 단일 독립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고, 사분오열 지방 봉건체제를 유지하였다. 나는 이 기고문에서 기나긴 에티오피아 역사를 전부 섭렵할 수는 없고, 다만 우리가 조선조 말기 중․러․일 간의 직접 각축과 영․불․독․미의 간접 영향권에 휘말리다 결국 영국 및 미국을 등에 업은 일본에 의해 병탄되던 것과 유사한 과정을 겪으면서도, 영국, 이집트, 수단, 이탈리아 등과 싸우며 조국을 사수한 에티오피아 왕족과 국민들의 끈질기고, 용감한 최근세 역사 드라마에 대해 일별하고자 한다.
에티오피아가 유럽 식민 사냥의 희생물이 되지 않은 요체는 뿌리 깊은 신앙으로 정신 무장된 국민들에게도 있었지만, 무엇 보다도 자신의 목숨은 물론 왕족의 멸문을 마다하지 않고 조국을 사수한 국왕들의 살신성인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한다. 봉건 지도자들 간의 왕권 투쟁이 극심하던 그 당시 왕의 죽음은 곧 왕위를 노리는 정적에게 왕권을 빼앗기고, 자신의 왕족이 몰락하는 것이 자명함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초개같이 던진 이 나라 왕들을 보면, 임진왜란 때 선조가 백성과 한성을 버리고 의주로 황급히 몽진한 후 그도 모자라 압록강을 건너 중국 땅으로 망명을 시도하며 구차한 목숨을 보전하였던 것과는 너무 대조적이라고 할 것이다. 에티오피아 국왕들은 우선 외침의 위난을 당하면 궁궐에 앉아 보고받고 지휘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직접 전선에 나가 몸소 진두지휘하며 싸웠다. 다음으로 그들은 싸움에서 물러서거나, 비겁하게 타협하거나, 항복하기를 거부하였으며, 그들에게는 이기거나, 죽거나 둘 중의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이 두 가지가 과거 강화도, 의주, 남한산성 등지로 피신해 다니던 우리의 왕들과 다른 점이었다.
테워드로스 2세(Tewodros II, 1818?~1868)는 1868년 4월막달라(Magdala) 지역에서 Robert Napier 경이 이끄는 32천명의 영국 원정대를 맞아 싸우다 궁지에 몰려 승산이 없다고 깨닫고, Napier 사령관에게 결투로 승부를 내자고 제의하여 거절당하자, 그 전에 엘리자베스 여왕으로부터 선사받았던 권총으로 장렬 하게 자결하고 말았다. 그는 물론 비천한 신분인 자신의 어머니를 비하한 책을 저술하였다는 이유로 영국인 선교사를 억류하는 등 영국군의 침입을 자초한 우를 범하였으나, 어쨌든 이로써 왕권은 요하네스 4세(Yohannes IV, 1837~1889))에게로 넘어갔다.
1872년 왕위를 계승한 요하네스는 1875~76년 에리트리아 지방을 통해 침입한 이집트 군을 연이어 격파함으로써, 이집트의 에티오피아 점령 기도를 무산시키는 동시에, 노획한 무기로 자국 군의 장비를 현대화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1871년 통일을 이룩한 이탈리아가 식민 야욕의 마수를 뻗어왔다. 당시 아프리카 및 중동은 물론, 인도 진출의 교두보였던 이집트 관리에 주력하였던 영국(1882년 이집트 점령)이 지부티를 점거한 프랑스의 Horn of Africa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견제하고, 터키의 홍해 연안 진출을 방지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에리트리아 및 에티오피아 지역 진출을 내심 환영하면서 묵인하였던 까닭이다. 이 점에서 한일합방 전 영국 및 미국이 러시아의 한반도 진출을 견제하고, 중국의 오랜 종주권 고리를 끊어 버리려는 차원에서 각각 영일동맹(1902년 및 1905년) 및 카쓰라-태프트 비밀협약(1905년)을 통해 일본의 한반도 통치를 인정하였던 사태와 유사하다고 하겠다. 영국은 이탈리아의 침입이 요하네스 국왕으로 하여금 수단의 마흐디스트 회교도들(Mahdists or Dervishes)과 제휴하여 반 이집트 또는 반 유럽 동맹을 결성하게 되면, 이집트의 안정을 해칠 수도 있다는 우려를 하면서도, 요하네스에게 이탈리아에 도발하지 말고 고분고분하라고 거듭 압력을 가하여 왔다. 그는 이러한 영국의 요구를 완강히 거부함으로써, 영국의 분노를 사는 동시에, 이탈리아의 도전에 불붙였다. 설상가상으로, 요하네스에게 패퇴한 이집트 군이 영국의 요청으로 수단에서 본국으로 철수하자, 마흐디스트 회교도들이 이 공백을 틈타 수단에서 세력을 키우고 1888년 에티오피아 수도 곤다르(Gondar: 아디스 아바바 북북서 약 700km 위치)를 유린하였다. 국내적으로도 이탈리아와 제휴한 메넬릭의 적대행위가 고조되자, 사면초가에 처한 요하네스도 이탈리아 군보다 마흐디스트부터 꺾어 버리기로 작정하였다. 그는 10만 병력을 투입하여 1889년 3월 마타마 전투(Battle of Matamma)에서 6~7만 명의 마흐디스트 군과 맞붙어 1차 승리하였으나, 불행히도 자신은 총상을 입고 전사하고 말았다. 이탈리아와 마흐디스트의 침입에 맞서 요하네스 왕은 에티오피아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하며 10만 병력을 모았다.
“아, 에티오피아의 아들들이여! 명심하라, 이 에티오피아는 첫째 너희의 어머니며, 둘째 너희의 왕관(영광)이고, 셋째 너희의 아내이며, 넷째 너희의 자녀이고, 다섯째 너희의 무덤 이라는 것을! 그러니, 분연히 일어나 어머니의 사랑과 같고, 왕관의 영광과 같은 에티오피아를 수호할 지어다! ....”
뒤이어 같은 해 5월 양국은 요하네스 시절의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의 에리트리아 지역 통치권을 인정하는 대신, 이탈리아는 메넬릭 2세(Menelik II)의 왕권을 승인하는 우찰레 조약(Treaty of Wechale)을 체결하였다. 그 해 11월 메넬릭 2세가 왕위에 올랐다. 그는 수도도 곤다르에서 현재의 아디스 아바바(Addis Ababa)로 옮겼고, 그 전 왕들이 추진해 온 국가 통일을 이룩한 국왕으로 평가된다. 에티오피아는 이탈리아로부터 다량의 무기를 구입하는 등 한 동안 양국은 우호관계를 유지하였으나, 우찰레 조약 제17조의 해석을 놓고 차츰 상호 갈등이 증폭되어갔다. 암하릭어 조약문 제17조는 에티오피아가 제3국과 접촉할 경우 이탈리아를 거칠 수 있다고 규정한 반면, 이탈리아어 조약문에서는 그러한 접촉을 반드시 이탈리아를 통하여 하도록 규정, 마치 1905년 한-일 을사보호조약 같이 사실상 에티오피아를 이탈리아의 보호령으로 만들어 놓아, 메넬릭은 1893년 이 조약을 무효 선언해 버렸다. 이탈리아는 이미 1890년 1월 에리트리아 및 홍해 연안을 식민지화한 후, 이 지역을 발판으로 점차 에티오피아 영토 안으로 남진해 왔다. 이들이 1894년 이후로는 마침내 현 북부 티그라이(Tigray) 주의 수도인 메켈레(Mekele)에 이르게 되자, 메넬릭은 1895년 9월 17일 다음과 같이 신앙심과 인종차별 감정을 부추기며 동원령을 내렸다.
“적들은 여기에 와서 우리나라를 멸하고, 우리의 종교를 바꾸려 한다. 이들은 앞으로 나아가며 두더지처럼 이 나라를 파고들고 있다. 나는 신의 도움을 받아 그들을 물리칠 것이 다. 힘이 있는 사람은 내게 힘을 보태고, 약한 사람은 기도로 나를 도우라!(You who are strong, give me your strength, and you who are weak, help me by prayer!) 만일 그대들 이 나를 따르지 않는다면, 나는 반드시 처벌하리라!... 흑사(흑 인)에 물리면 나을 수 있지만, 백사(유럽 백인)에 물리면 약 도 없나니.”
마침내 1896년 2월 29일 에티오피아 군 10만 명은 아드와(Adwa) 계곡에 진을 치고 있던 이탈리아 군 2만 명을 협공하여 승리를 거두었다(Battle of Adwa). 이탈리아 군은 연대장 급 지휘관 3명을 포함한 7천 명을 잃고, 1천 5백 명 부상과 3천 명 포로의 피해를 당하였고, 에티오피아 군 피해는 6천 명 사망에, 8천 명 부상이었다. 1896년 10월 26일 아디스 아바바 강화 조약으로 우찰레 조약은 정식 폐기되고, 에티오피아 제국의 독립이 보장되었다. 에티오피아는 1936~ 41년간 이탈리아 무솔리니에 의해 점령당하는 수모를 겪기는 하였으나, 유럽의 식민지는 되지 않았다. 결국 에티오피아 인들은 백사에게 무수히 공격당하고, 몸이 휘감겨 조인 적은 있어도, 물려서 먹잇감으로 떨어지지는 않은 것이다.
나는 지난 해(2006년) 말 메켈레에서 악숨으로 가는 길에 아드와 계곡에 멈추어 서서, 110년 전의 그 전장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시름에 잠긴 적이 있다. 이렇게 역사가 오래고, 찬란한 문화를 간직하며, 자존심 강하고, 용감한 민족이 왜 이다지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하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그것이 누구의 탓이며, 무슨 이유일까? 종교개혁을 거친 적 없이 구약성서 식 계율을 그대로 따르는 종교와 그로 인한 국민들의 보수적 사고 방식 때문 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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