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5주년 기획으로 ‘강에서 띄우는 그림편지 - 한국의 5대강을 가다’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낙동강을 시작으로 섬진강, 영산강, 금강, 한강(남·북한강)을 모두 돌아보는 이번 기획은 ‘우리 시대의 진정한 진경산수화’의 세계를 개척하고 있는 이호신 화백과 함께합니다.
나주 영산포에서 구진포, 무안 식영정까지
영산강하구둑 막은 후 하류수질 더 나빠져
하구의 물너울 사이로
힘을 내며 멸치젓을 실어 오던 못 생긴 똑딱선은
누이가 개짐을 빨던 그 근처의 모래톱에
물없이 먹은 된밥처럼 종종 걸리곤 했다
뱃놈 총각은 누이의 빨래터로 음(淫)한 휘파람을
속옷처럼 휙휙 벗어 던졌다
…
달밤이면 불 같은 사랑을 참지 못한
꽃게들이 예쁘게 차린 술집여자 모양
살을 섞으러 모여들었다
…
영산포에서 쌀을 바꾸어가던 뱃놈은
하구언공사로 뱃길이 막히는 바람에
다시는 올라오지 못했다 바보 같이
소금을 먹지 못한 꼬막과 고둥은
소금처럼 허옇게 야위어 죽고
누이는 열 아홉 나이보다
한 개의 사랑 때문에 울었다
고 임찬일 시인의 ‘고향의 강’이란 시입니다. 영산강 하구가 하구둑으로 막히기 전과 막히던 시절의 이야기가 눈앞에서 전설처럼 되살아납니다.
고 임찬일 시인은 이번 5대강 기행에서 만난 최고의 시인입니다. 백호 임 제 선생의 후손인 그는 백호의 기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천재시인이었습니다.
1986년 ‘월간문학’ 소설 부문으로 등단한 임 시인은 같은해 중앙일보 전국시조백일장 장원, 스포츠서울 시나리오 공모 당선 등 3관왕을 기록했습니다.
1992년에는 동아일보 신문예 시조 부문 당선, 1996년에는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으로 소설 시 시조 시나리오 등 주요 장르를 망라하는 5관왕을 차지했습니다. 우리나라 문단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죠.
왕성한 창작욕을 불태웠던 그는 47세였던 2001년 소설 ‘임제’(전 2권)를 탈고한 직후 지병인 간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39세의 나이로 요절한 백호 임 제 선생을 뒤따른 것인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했습니다.
영산강 본류의 대장정이 한눈에
임찬일 시인의 고향은 나주 영산포 하류 마을인 다시면 가흥리입니다. 구진포 임제기념관이며 물곡사(勿哭辭) 시비, 임제 묘소가 있는 신걸산(다시면 가운리)도 아주 가까운 곳에 있죠.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 오면/ 난 그쪽 하늘부터 바라본다/ 전라도 나주땅 다시면 가흥리/ 거기는 살아 생전에 바꿀 수 없는/ 내 서러운 본적지’ - ‘본적지’
‘저물어가는 포전에서/ 누이의 허벅지처럼 희고 긴 무를 뽑아/ 손아귀로 비틀어 남몰래/ 감추듯이 강물에다 내던지면/ 시퍼렇게 입술을 물고 쳐다보던/ 강의 눈빛/ 허기를 타고 올라오는 무트림에/ 내 가난한 시절은 진저리쳤다/ …’ - ‘누이가 있는 강’
영산포를 지난 영산강은 민물장어로 유명한 구진포, 임제기념관을 거쳐 임찬일 시인의 고향인 가흥리로 흘러듭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내려오면 요즘 들어 유명한 관광지로 자리잡은 ‘주몽 촬영장’이 영산강 옆 절벽 위에 세워져 있습니다.
이 일대 영산강을 가장 잘 보는 방법은 나주시 공산면 신곡리 금강정 뒤로 난 산길을 따라 능선을 오르는 겁니다. 이 능선 절벽 위에 서면 멀리 영산포에서 구진포, 임찬일 시인의 고향마을인 가흥리 일대까지 세 번을 크게 굽이쳐 내려오는 영산강 본류의 대장정이 한눈에 펼쳐집니다.
이 지점을 안내해준 사람은 영암군청 기획예산실의 천재철 계장입니다. 이번 영산강 취재는 천 계장의 도움이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는 이호신 화백과 제가 내려오기 전 영산강 중류에서 하류에 이르는 중요한 문화유적과 전망지점을 미리 답사하는 등 철저한 준비로 우리를 맞았습니다.
천 계장은 김홍남 전 중앙박물관장과 함께 영암 구림마을 문화복원사업을 추진했던 핵심 실무자로 문화 전반에 대한 안목이 뛰어났습니다. 고등학교 때 영암에서 영산포가는 버스를 타고 영산포에서 걸어 임 제 선생의 묘소를 참배했을 정도로 대단한 열정의 소유자였습니다.또 3년 동안 이호신 화백에게 영암 지역을 안내해서 그림을 그리게 하고, 이 그림들을 모아 ‘영암의 빛과 바람’이란 전시회까지 성사시킨 천 계장은 정말 요즘 보기 드문 공무원이었습니다.
가장 고마웠던 것은 천 계장이 3박4일 동안 어머니가 사시는 영암의 고향집을 숙소로 빌려주었다는 겁니다. 사실 남자들끼리 며칠씩 다니는 취재에서 제일 큰 고민거리 가운데 하나가 숙소입니다. 샤워시설 정도가 있는 민박집이면 딱 좋겠는데, 그런 숙소 구하는 게 만만한 일이 아닙니다.
2007년 여름 낙동강 취재 때 신문사 선배와 대구 화원나루 옆 모텔에서 숙박을 했습니다. 인터넷은 써야겠고 주말이라 방이 별로 없었죠. 겨우겨우 모텔을 구해 들어갔더니 방을 다 차지한 디럭스침대가 하트 모양에 분홍빛이더군요.
2000년 이후 BOD 5~8ppm
금강정 일대를 지난 영산강은 행정구역과 지형이 상당히 복잡해집니다. 금강정 북쪽 강 건너편에 있는 석관정은 나주시 다시면입니다. 여기서 조금만 하류로 내려가면 영산강 서쪽은 함평군 학교면이 되고, 동쪽은 나주시 동강면이 됩니다. 동강대교를 지나면 영산강 서쪽은 이제 무안군 몽탄면이 됩니다.
항공기에서 볼 때 ‘영산강의 한반도지형’으로 보이는 장구부마을 물굽이, 영산강 중류의 도도한 물줄기를 전망할 수 있는 식영정 정자도 모두 무안군 몽탄면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대 영산강은 눈으로 그냥 봐도 수질 상황이 심각합니다. 실제 환경부 수질측정에서 영산포(구진포나루) 지점의 수질은 2000~2007년 사이 BOD 5~8ppm을 오르내리고 있습니다. 이 정도면 대구 이남의 낙동강보다 훨씬 나쁘고 농업용수로 쓰기에도 꺼림칙한 수준이죠.
영산강 수질이 이렇게 된 것은 영산강하구둑을 막은 뒤부터입니다. 서해가 만조일 때 영산포 일대까지 강물이 역류하고 여름엔 수해도 심각하다고 해서 1981년 12월에 하구둑을 막았죠.
그러나 그 뒤로 강 흐름이 약해지면서 수질오염이 더 심각해졌습니다. 임찬일 시인은 ‘종옥이의 강’이란 시에서 물 흐름이 바뀐 영산강의 변화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종옥이는 물속 아래로 내려가 아직도/ 싱싱하고 탐스러운 꼬막을 잡고 있는 것일까/ 종옥이의 비명처럼 하얗게 죽은 고기들이 떠오르고/ 그것들을 떠메고 가는 강물에 발을 담근 채/ 갈대들이 일제히 상복을 입고 서서/ 만장 깃발 같은 갈꽃을 흔들고 있을 뿐/ 내가 아는 종옥이처럼/ 고향의 강도 지금은 죽었다’
나주 함평 무안 = 그림 이호신 화백
글 남준기 기자 jknam@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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