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에뜨 몬드리안은 수직·수평구조와 원색의 사용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화가이다. 몬드리안은 1872년 네덜란드에서 청교도적 순결한 신념으로 무장한 칼뱅파 신교도집안의 5형제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교장이며 아마츄어 화가인 아버지와 직업화가인 백부의 지도로 일찍부터 미술교육을 받았지만 그의 아버지는 그가 화가보다는 교직에 몸담기를 바랬다. 결국 몬드리안은 국가시험에 합격하여 아버지의 바램대로 초등학교 미술교사가 되었지만 거기에 인생을 바칠 생각은 없었다. 예술과 종교와의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는 한때 성직자가 될 생각도 한 그였지만 그림에 대한 열정을 누를 수 없어서 암스테르담으로 진출하게 된다. 거기서 소묘반 야간부에 다니며 꾸준히 작업에 열중하던 그는 경제적 곤란으로 초상화, 고전명화의 복제, 식물도감, 풍경화 등을 그려서 팔기도 했다.
대부분의 화가들이 그러하듯 몬드리안 역시 처음부터 지금의 스타일을 구축한 것은 아니었다. 그의 나이 35세때 후기 인상파의 작품을 처음 접하면서 색채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그때까지 당시 네덜란드에 유행하던 풍경화와 정물화를 주로 그리던 그로서는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피카소와 브라크의 초기 입체화의 작품에서 너무나 큰 감명을 받은 몬드리안은 피카소가 머물고 있던 몽파르나스 지역에 숙소를 구할만큼 열심이었다. 게다가 그는 1차 세계대전의 혼란기 동안 '자연이란 불쾌하고 무질서한 것이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이즈음 그가 주도한 <데 스타일="">(De Stijl)운동의 선구자들은 자신들의 회화언어로는 직선과 직각, 즉 수직선과 수평선만을 색채는 빨강·노랑·파랑의 3원색, 그리고 흰색 회색 검은색 등 세 가지 무채색만을 사용하기로 약속하게 되었다. 그 목표는 실제의 자연계에는 결여되어 있는 정확하고 기계적인 질서를 창조하는 것이었다. 이 새로운 표현양식을 몬드리안은 '신조형주의'라고 불렀다. 이때부터 몬드리안은 지저분한 자연의 미술을 버리고 '신조형주의'라는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해 나가게 되었다.
몬드리안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운하와 잘 닦인 도로가 기계적으로 배치되어 인공적으로 조성된 경관이 빼어난 네덜란드 출신이었다. 어쩌면 그의 작품에서 읽을 수 있는 원칙적이고 흐트러짐이 없는 딱딱함은 그의 출신배경의 영향 탓도 큰 것 같다. 몬드리안에게 수직선은 '생기'를, 수평선은 '평온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 두 선들이 서로 적절한 각도에서 서로 교차하면 '역동적인 평온함'에 도달할 수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직사각형들의 그림에서 몬드리안은 검은 선만으로 직사각형을 형성한 금욕적인 그림을 그렸다. 그뿐 아니라 질서의 신봉자였던 몬드리안은 주위 환경까지도 자신의 그림같이 변형시켰다. 그의 화실벽면은 삼원색과 회색 흰색 검은색의 직사각형으로 뒤덮여 있었다. 꽃병에 인조 튜울립을 한 송이 꽂아 놓았는데 그 잎사귀마저도 초록색은 사용하지 않는 그의 방침에 따라 흰색으로 칠해 놓았다. 모든 가구들은 흰색과 검은색으로 페인트칠했으며 전축만은 선명한 빨간색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다른 경제적 일을 가지지 않았던 그는 그의 작품을 이해하지 못하는 대중들 때문에 경제적 곤란이 계속되었다. 1950년도에 들어서면서 미국의 작품수집가에 의해 처음으로 추상작품이 팔려지면서 비로소 그의 특징있는 작품들은 대중들 사이에 널리 알려져 현대미술의 상징처럼 되었다. 몬드리안은 주관적인 감성을 중요시하는 사조들의 반대편에 섰다는 점에서 미술사에 중요한 인물로 기록된다.
고유나 리포터 yn121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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