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보는 우리 문화유산 31> 18세기의 신도시, 수원성(마지막회)
조선후기의 건축미학이 꽃핀 수원 화성
지역내일
2001-07-12
(수정 2001-07-13 오후 5:45:59)
공사비용은 전부 임금이 사사로이 지출했으니
진실로 임금의 밝은 덕을 베풀었고
부역은 농사 때를 빼앗지 않았으니
모두 선대의 백성들을 감싸주는 아름다운 덕이라 하네
감히 상량의 노래를 본받아
일꾼들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한다
어여차 대들보를 동쪽으로 던져라
용연(龍淵)에 밝은 해가 먼저 붉게 떠오르니 …
- 팔달문 상량문 중에서
지금의 수원시는 18세기에 건설된 신도시다. 1789년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가 융릉으로 이장되면서 수원은 1000여년 동안 살아오던 옛 고을을 버리고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물론 정조는 자기 아버지의 묘소를 옮기기 위해 억지로 고을을 옮긴 것이 아니었다. 신도시의 위치는 이미 150년 전에 반계 유형원이 옛 수원을 옮겨야 할 후보지로 점찍어 놓은 곳이었다. 정조는 반계의 주장을 익히 알고 있었다. 새 고을 터를 선정한 장본인은 정조 자신이었다.
신도시는 왜 수원에 건설되었을까. 육로운송의 발달과 함께 당시 서해안의 해운자본은 강화도를 돌아 들어가던 한강수로를 피해 남양만에서 수원을 거쳐 송파로 연결되는 새로운 교통로를 확보했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강화도를 지나 한강을 거슬러올라가는 뱃길은 매우 힘들고 위험했다. 여기에 비해 새 교통로는 훨씬 안정된 운송로였다. 남양만에서 육로를 통해 수원-과천을 지나 지금의 양재대로 노선을 따라가면 송파나루에 닿는다. 송파나루에는 한강을 오르내리는 배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수원 신도시 건설은 서해 해운과 한강 수운의 중계권을 갖고 있었던 경상(京商:서울상인)들과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정조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지는 사업이었다. 정조는 당시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던 서인 세력을 견제하면서 채제공이나 정약용 등 남인계의 실학파를 등용, 경제 중심의 신도시 건설에 나섰던 것이다.
정조와 정약용, 채제공의 합작품
5년 후인 1794년, 새 수원의 외곽에 성곽을 쌓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익히 알려진 바, 수원성 건설의 계획자는 다산 정약용이었고 공사 총책임자는 좌의정이었던 채제공이었다.
다산은 불과 31세의 나이에 새로운 도시성곽의 설계를 맡았다. 물론 27세에 한강에 배다리를 성공적으로 놓아 그 실력을 인정받은 바 있었지만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정조가 정약용에게 이 일을 맡긴 것은 과거의 성곽 형태에 익숙해져 있는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으로는 새로운 개념의 성의 설계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 임금에 그 신하였다. 다산은 정조의 기대에 맞는 참신한 성곽을 계획해냈다. 왕실 홍문관에 근무하던 그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지식을 마음껏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정조가 즉위하던 해 중국에서 큰돈을 주고 구입했던 5000권짜리 《고금도서집성》같은 최신 서적이 많은 참고가 되었다.
실제 축성과정에서 수원성은 기본적으로 다산의 계획안을 그대로 수용했다. 정조는 다산이 1년에 걸쳐 작성, 제출한 <성설(城說)>을 자구 하나 고치지 않고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이라는 제목으로 반포했다.
수원성이 조선후기 ‘성곽의 꽃’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그때까지의 읍성에 비해 군사적인 기능에서나 성곽 축조의 기술적 측면에서 완전히 새롭고 획기적이었기 때문이다.
성곽의 건축물은 철저하게 남인들의 고전적인 합리주의 미학을 따르고 있다. 성곽 시설물들의 좌우대칭, 평면과 입면의 일정한 비율과 기하학적 분수, 투상도법적 공간에의 접근 등이 그것으로 … 가장 자유스러운 공간으로 보이는 방화수류정조차도 대단히 기하학적으로 엄격한 공간조직을 간직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 김홍식. <18세기 신도시="" 20세기="" 신도시="">
수원성은 그 건축과정도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공사비용은 모두 중앙정부에서 조달했다. 87만냥의 돈과 1500석의 쌀이 들어갔는데 대부분 여러 지방관청이나 군대에서 10년 동안 비축할 재원을 앞당겨서 사용하는 방식을 썼다.
비용 조달을 위해 정조는 스스로 모범을 보였으니, 임금이 제사 지낼 제물도 평소보다 훨씬 격을 낮추었으며, 일용품의 공납까지 그만두게 했다. 성은 십년이 걸려 쌓아도 될 일이지만 백성은 하루를 굶겨도 안된다는 게 정조의 뜻이었다.
공사에 투입된 품값은 날품으로 하지말고 짐수로 따져 주되, 거리의 멀고 가까운 데 따라 차등을 두게 하면, 힘센 사람은 100냥 돈을 넉넉히 벌 수 있을 것이고 … 이쯤 되면 품을 팔아서 자생하는 사람들이 다투어 모여들 것이다. 이 사람들이 가게도 지어 술도 빚고 밥도 지어서 팔아서 …
- 정조의 윤음(綸音:임금의 뜻을 밝힘) 중에서
정조는 “이렇게 하면 성을 쌓는 측면에서는 몇만대에 걸쳐서도 없어지지 않는 기초를 마련하는 셈이고, 백성의 측면에서는 몇만호가 기름진 농토를 얻게 되며, 저축하는 측면에서는 만명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저축하게 되니 화성 성역을 감독하는 신하는 이 말을 마음 속 깊이 새겨두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200년 전에 이미 ‘뉴디일 정책’의 원리를 적용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수원성, 《화성성역의궤》
18세기의 신도시 수원은 이후로도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수원성은 일제강점기 이후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행궁이 철거되었고 의도적인 훼손으로 성곽은 곳곳에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6·25 전쟁 당시의 치열한 시가전은 수원성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장안문 문루가 사라졌고 포루나 공심돈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무너진 남문과 남수문 일대에는 영세상인들이 모여들어 시장을 형성했다.
그러나 1975년부터 시작된 수원성 복원공사는 놀랄 만큼 수원성의 완벽한 원형을 되찾아놓았다. 이같이 충실한 복원이 가능했던 것은 축성 당시 작성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라는 공사기록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체분량 640여장(최근 경기문화재단에서 출판된 번역서는 총 830쪽), 총 10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수원성 완공 직후부터 편찬되어 1800년에 금속활자본으로 출간됐다.
이 책이 수원성 축성과정을 얼마나 자세하고 아름답게 기록했던지 역사탐방연구회 염상균 이사는 “수원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때 《화성성역의궤》 가 큰 도움이 됐을 정도”라고 말한다.
강화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화성성역의궤》 요약번역본이 100년 후에 유럽에서 나왔는데 이 번역본이 세계유산 지정심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 글 남준기 기자 jknam@naeil.com 18세기>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성설(城說)>
진실로 임금의 밝은 덕을 베풀었고
부역은 농사 때를 빼앗지 않았으니
모두 선대의 백성들을 감싸주는 아름다운 덕이라 하네
감히 상량의 노래를 본받아
일꾼들의 노고를 위로하고자 한다
어여차 대들보를 동쪽으로 던져라
용연(龍淵)에 밝은 해가 먼저 붉게 떠오르니 …
- 팔달문 상량문 중에서
지금의 수원시는 18세기에 건설된 신도시다. 1789년 정조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가 융릉으로 이장되면서 수원은 1000여년 동안 살아오던 옛 고을을 버리고 지금의 위치로 옮겨졌다.
물론 정조는 자기 아버지의 묘소를 옮기기 위해 억지로 고을을 옮긴 것이 아니었다. 신도시의 위치는 이미 150년 전에 반계 유형원이 옛 수원을 옮겨야 할 후보지로 점찍어 놓은 곳이었다. 정조는 반계의 주장을 익히 알고 있었다. 새 고을 터를 선정한 장본인은 정조 자신이었다.
신도시는 왜 수원에 건설되었을까. 육로운송의 발달과 함께 당시 서해안의 해운자본은 강화도를 돌아 들어가던 한강수로를 피해 남양만에서 수원을 거쳐 송파로 연결되는 새로운 교통로를 확보했다.
조수간만의 차이가 심한 강화도를 지나 한강을 거슬러올라가는 뱃길은 매우 힘들고 위험했다. 여기에 비해 새 교통로는 훨씬 안정된 운송로였다. 남양만에서 육로를 통해 수원-과천을 지나 지금의 양재대로 노선을 따라가면 송파나루에 닿는다. 송파나루에는 한강을 오르내리는 배들이 줄지어 대기하고 있었다.
수원 신도시 건설은 서해 해운과 한강 수운의 중계권을 갖고 있었던 경상(京商:서울상인)들과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정조의 이해관계가 딱 맞아떨어지는 사업이었다. 정조는 당시 정국을 주도하고 있었던 서인 세력을 견제하면서 채제공이나 정약용 등 남인계의 실학파를 등용, 경제 중심의 신도시 건설에 나섰던 것이다.
정조와 정약용, 채제공의 합작품
5년 후인 1794년, 새 수원의 외곽에 성곽을 쌓는 공사가 시작되었다. 익히 알려진 바, 수원성 건설의 계획자는 다산 정약용이었고 공사 총책임자는 좌의정이었던 채제공이었다.
다산은 불과 31세의 나이에 새로운 도시성곽의 설계를 맡았다. 물론 27세에 한강에 배다리를 성공적으로 놓아 그 실력을 인정받은 바 있었지만 상당히 파격적인 일이었다. 정조가 정약용에게 이 일을 맡긴 것은 과거의 성곽 형태에 익숙해져 있는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으로는 새로운 개념의 성의 설계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그 임금에 그 신하였다. 다산은 정조의 기대에 맞는 참신한 성곽을 계획해냈다. 왕실 홍문관에 근무하던 그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지식을 마음껏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정조가 즉위하던 해 중국에서 큰돈을 주고 구입했던 5000권짜리 《고금도서집성》같은 최신 서적이 많은 참고가 되었다.
실제 축성과정에서 수원성은 기본적으로 다산의 계획안을 그대로 수용했다. 정조는 다산이 1년에 걸쳐 작성, 제출한 <성설(城說)>을 자구 하나 고치지 않고 <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이라는 제목으로 반포했다.
수원성이 조선후기 ‘성곽의 꽃’으로 일컬어지는 것은 그때까지의 읍성에 비해 군사적인 기능에서나 성곽 축조의 기술적 측면에서 완전히 새롭고 획기적이었기 때문이다.
성곽의 건축물은 철저하게 남인들의 고전적인 합리주의 미학을 따르고 있다. 성곽 시설물들의 좌우대칭, 평면과 입면의 일정한 비율과 기하학적 분수, 투상도법적 공간에의 접근 등이 그것으로 … 가장 자유스러운 공간으로 보이는 방화수류정조차도 대단히 기하학적으로 엄격한 공간조직을 간직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 김홍식. <18세기 신도시="" 20세기="" 신도시="">
수원성은 그 건축과정도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공사비용은 모두 중앙정부에서 조달했다. 87만냥의 돈과 1500석의 쌀이 들어갔는데 대부분 여러 지방관청이나 군대에서 10년 동안 비축할 재원을 앞당겨서 사용하는 방식을 썼다.
비용 조달을 위해 정조는 스스로 모범을 보였으니, 임금이 제사 지낼 제물도 평소보다 훨씬 격을 낮추었으며, 일용품의 공납까지 그만두게 했다. 성은 십년이 걸려 쌓아도 될 일이지만 백성은 하루를 굶겨도 안된다는 게 정조의 뜻이었다.
공사에 투입된 품값은 날품으로 하지말고 짐수로 따져 주되, 거리의 멀고 가까운 데 따라 차등을 두게 하면, 힘센 사람은 100냥 돈을 넉넉히 벌 수 있을 것이고 … 이쯤 되면 품을 팔아서 자생하는 사람들이 다투어 모여들 것이다. 이 사람들이 가게도 지어 술도 빚고 밥도 지어서 팔아서 …
- 정조의 윤음(綸音:임금의 뜻을 밝힘) 중에서
정조는 “이렇게 하면 성을 쌓는 측면에서는 몇만대에 걸쳐서도 없어지지 않는 기초를 마련하는 셈이고, 백성의 측면에서는 몇만호가 기름진 농토를 얻게 되며, 저축하는 측면에서는 만명이 먹을 수 있는 양식을 저축하게 되니 화성 성역을 감독하는 신하는 이 말을 마음 속 깊이 새겨두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200년 전에 이미 ‘뉴디일 정책’의 원리를 적용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수원성, 《화성성역의궤》
18세기의 신도시 수원은 이후로도 발전을 거듭하고 있지만, 수원성은 일제강점기 이후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행궁이 철거되었고 의도적인 훼손으로 성곽은 곳곳에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특히 6·25 전쟁 당시의 치열한 시가전은 수원성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혔다. 장안문 문루가 사라졌고 포루나 공심돈도 대부분 파괴되었다. 무너진 남문과 남수문 일대에는 영세상인들이 모여들어 시장을 형성했다.
그러나 1975년부터 시작된 수원성 복원공사는 놀랄 만큼 수원성의 완벽한 원형을 되찾아놓았다. 이같이 충실한 복원이 가능했던 것은 축성 당시 작성된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라는 공사기록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전체분량 640여장(최근 경기문화재단에서 출판된 번역서는 총 830쪽), 총 10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수원성 완공 직후부터 편찬되어 1800년에 금속활자본으로 출간됐다.
이 책이 수원성 축성과정을 얼마나 자세하고 아름답게 기록했던지 역사탐방연구회 염상균 이사는 “수원 화성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때 《화성성역의궤》 가 큰 도움이 됐을 정도”라고 말한다.
강화 외규장각에 보관돼 있던 《화성성역의궤》 요약번역본이 100년 후에 유럽에서 나왔는데 이 번역본이 세계유산 지정심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 글 남준기 기자 jknam@naeil.com 18세기>어제성화주략(御製城華籌略)>성설(城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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