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가 무슨 상관, 좋아서 하는 공부가 진짜 공부에요”아스팔트도 녹여버릴 듯 한여름 뙤약볕이 기승을 부리던 7월의 어느 날. 분당구 구미동에 위치한 한국방송통신대학교(이하 방송대) 성남 캠퍼스에는 한여름 더위를 무색케 할 만큼 공부에 여념이 없는 사람들이 있다. 방송대라는 특성상 젊은 이부터 중ㆍ장년층의 학생들이 그룹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유독 시선이 쏠리는 한 사람이 있다. 언뜻 보기에는 노교수다운 포스를 풍기며 스터디에 열중인 사람. 하지만 그는 방송대 중문과 4학년에 재학 중인 늦깎이 대학생 권기안(78ㆍ용인 상현동)씨다.
“평소에 중국 영화에 관심이 많았어요. 자막 없이 직접 보고 싶은 마음에 중국어 공부를 해야지 마음먹었죠. 지인이 방송대 미금 학습관이 생겼다며 권유를 하길래 처음엔 스터디 그룹에 참석해 분위기를 봤어요. 젊은 사람들과 어울려 얘기도 하고 공부도 할 수 있으니 좋더라고요.” 그렇게 한 학기를 두루두루 어울려보니 공부의 참 맛을 느낄 수 있겠다 싶어 3학년 편입을 결심하게 되었고 그렇게 1년을 어렵사리 달려와 졸업을 한 학기 남겨둔 4학년생이 되었단다.
서울대 나온 인텔리, 방송대 중문과에서 공부하는 즐거움 느껴
사실 권기안씨는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인 서울대에서 토목을 전공하고 서울 철도청장을 역임했을 정도로 화려한 스펙(?)을 자랑한다. 그런 그가 방송대에서 다시 공부를 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저 공부가 즐겁기 때문.
“예전에 우리가 배웠던 건 생업을 위한 공부였지. 남자는 무조건 공대에 가야 했고 기술이 필요한 시대였으니 말이죠. 지금 내가 하고 싶은 공부는 인문학이니 아무려면 어때요. 공부를 하는데 나이 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지금 내가 졸업장이 필요 한 것도 아니니 그냥 재미나게 공부만 하면 되잖아요.”
그러면서도 은근슬쩍 4학년 1학기 성적표를 내밀며 멋쩍게 웃는 권기안씨. 성적표에는 평점 B학점의 비교적 높은 점수가 고스란히 기록돼 있다. 그중 ‘중국 현대사’ 과목은 당당히 A학점.
“우리 나이쯤 되면 읽고 돌아서면 잊어버려요. 머리에 입력이 잘 안 돼. 그래서 공부가 쉽지는 않아요. 그러니 2~3배는 더 읽고 반복해야 겨우 남는 게 있단 말이죠. 처음엔 멋모르고 따라가려니 힘도 들고 했는데 공부가 그래요. 내가 좋아서 하다 보니 재미가 있는 거야”
현재 졸업 논문을 준비하고 있는 권씨는 공부를 하면서 중국 영화의 15% 정도는 알아듣게 되었다며 넌지시 자랑을 펼친다.
젊게 사는 비결은 바로 공부, 졸업 후엔 일본어과에 입학하고파
“한번은 중국 관련 사업을 하는 친구가 하필 번역가가 출타 중이라며 급하게 공문 하나를 보내 왔어요. 떠듬떠듬 번역을 해줬는데 나중에 내가 해준 것과 전문번역가의 번역이 동일하더라며 친구들 앞에서 칭찬을 해주더라고. 그때 ‘내 공부도 쓸모가 있구나’ 느꼈죠.”
지금도 동창회 모임에 가면 새로이 대학생활을 하고 있다고 자랑 아닌 자랑을 펼친다는 권기안씨. 젊게 사는 비결은 바로 ‘공부’라고 여러 사람들에게 권유해 그를 따라 방송대에 입학한 지인들도 제법 있단다.
“우리 중문과에 젊은 사람들도 있지만 나이 많은 학생도 2~3명 있어요. 그 중에 내가 제일 나이가 많지요. 하지만 방송대가 공부할 수 있는 시스템이 잘돼 있거든. 영상강의는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들을 수 있으니 뒤처지는 학생들은 계속 반복해 듣는 거야. 나 같이 나이든 사람들이 공부하기에 아주 좋아요.”
평생학습 시대에 방송대 학생들에 대한 칭찬도 마르지 않는 권씨. “여기 학생들은 본인이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 때문에 정말 열심히 해요. 주부들도 많은데 애 키워가며 악착같이 공부하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해요.”
그 역시 나이 먹어 스스로 공부를 하고 있는 만큼 토목 회사 고문으로 일하는 시간 외에 남는 시간엔 학교 도서관에 파묻혀 무더운 여름을 보내고 있다.
“방송대 동문 중에 80세 되신 분이 있는데 일문과 공부를 위해 잘 나가는 건축사 사무실을 문을 닫더라고요. 연세도 있어 일본어를 잘 할 텐데 왜 사무실까지 닫아가며 공부를 하느냐고 물었더니 ‘말 몇 마디 하는 것과 학문적인 것은 다르다’며 ‘죽을 힘을 다해 공부하고 있다’는 말에 뜨끔하면서도 감화를 받았어요.”
논어에는 70세를 종심(從心)이라고 칭해 ‘욕심나는 대로 행동해도 규범에 크게 어긋나지 않는 나이’로 지칭하고 있다. 그 역시 올해 말이면 졸업과 함께 80을 앞둔 나이가 된다.
“방송대가 들어가긴 쉬워도 졸업하기는 어려운 곳이에요. 우선은 시작했으니 졸업을 해야 겠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그만 두지는 않을 거에요. 여유 있게 시간을 가지고 다시 복습도 하고 또 내게 남은 시간이 있다면 일어과에 다시 입학해 일본 문학도 공부하고 싶고…욕심이 많죠? 하하. 공부는 자기 마음을 키우는 일이에요. 마음을 넓게 키우며 세상을 이해하는 힘을 길러야죠.”
권미영 리포터 myk31@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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