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과 대만 연결하는 57년간의 기록

'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지음. 구범진 옮김
푸른역사. 2만 9500원
올해로 건국 100년을 맞는 대만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인물을 한 명 꼽자면 역시 장제스(蔣介石)일 것이다.
1911년 신해혁명이 성공함으로써 쑨원(孫文)을 중심으로 중화민국이 세워진 것이지만, 쑨원의 시대는 너무 일찍 저물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받은 주인공이 바로 장제스였다.
그는 국민당 정부의 주석 겸 육해공군의 총사령관으로 만주를 침범한 일본에 맞서 항일전쟁을 수행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국공내전을 이끈 주인공이었다.
결국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의 해방군 세력에 패해서 타이완 섬으로 쫓겨갔지만, 그 뒤에도 20년 이상을 대만의 최고 정치 지도자로서 군림했다.
물론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국가 안팎에서 밀려드는 위협으로부터 본토를 수호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앞장서서 투쟁했다는 측면에서 영웅이라는 찬사를 듣기도 하지만 끝내 대륙에서 밀려났다는 점에서는 국공내전의 패배자일 뿐이라는 평가도 없지 않다. 국공내전의 과정에서 드러난 국민당 지도부의 모습 자체가 지리멸렬했다.
그렇기에 그가 생전에 남긴 기록을 슬쩍 들쳐볼 필요가 있다. 진흙탕을 달리는 수레바퀴처럼 급박하게 돌아가던 역사의 현장에서 그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그의 역사 인식을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거 한 시절을 풍미했던 정치 지도자로서 그의 품격과 자질도 가려질 수 있을 터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장제스가 젊은 시절부터 집권 말기까지 줄곧 일기를 썼다는 점이다.
스물일곱 살이던 1915년부터 교통사고로 일기장을 대하지 못하게 된 1972년까지 썼다고 하니, 해수로 따져서도 무려 57년간이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매일 저녁 시간을 내서 붓으로 일기를 써내려갔다고 한다. 현재 미국 후버연구소에 보관중인 그의 일기장이 모두 55권에 이르고 있다.
'장제스 일기를 읽다'는 그의 일기를 바탕으로 격동의 중국 근현대사를 재구성했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서 뉴욕의 뉴폴츠 대학교수를 지낸 레이 황(黃仁宇)이 그의 기록에 근거하여 장제스의 일대기를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일기에는 국민당이 중국공산당에게 패해 본토에서 쫓겨나게 된 과정과 국민당 정부가 대만 원주민들의 저항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던 1947년의 '2.28 사건' 등에 관한 내용도 두루 담겨 있다. 따라서 그의 개인적인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외에도 당시 중국과 대만의 양안(兩岸) 관계에 있어 역사적 공백을 메워주는 데도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다는 평가다.
이를테면, 제2차대전 당시 일본 폭격을 위한 거점으로 청두(成都)에 B-29가 발진할 수 있는 비행장 건설비용 문제로 인해 장제스와 갈등이 빚어지자 미국측은 그 대안으로 공산당 지원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또 장제스의 통역을 맡았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이 자주 그와 부딪쳤으며, 어떤 때는 사적인 언쟁으로 통역이 중단되기도 했다는 일화도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일기는 장제스가 자신을 되돌아보고 스스로 채찍질하려는 목적으로 씌어졌기 때문에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는 '일어나야 할 일'을 강조하고 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전적으로 일기의 내용에 의존해 역사적 사실을 판단하기에는 한계가 없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 기록의 가치를 존중한다. "일기의 수백 군데의 기록은 비록 장제스 특유의 과장된 자기중심주의를 표출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하나의 임무에 헌신하는 한 인간을 그려내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자는 장제스가 현대 중국의 발전과정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고 분석한다.
중국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상부구조를 세웠다는 것이다. 근대국가로의 전환에 필요한 통일된 국가적 지휘체계와 행정기구, 법정 통화, 군사학교를 포함한 통합된 교육 시스템을 도입했던 사실들이 사례로 제시된다. 물론 중화민국이 아직 대륙을 지배하던 시절의 얘기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이 임시변통으로 만들어졌고 파괴된 구질서로부터 건져온 것이어서 비효율적이며 불안정했던 것도 숨길 수 없었던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중국이 다른 나라들과 함께 세계 속에 자리잡도록 장제스가 기여한 부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중국 근대화의 장애 요인이던 군벌을 제거한 것도 장제스였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물론 이러한 평가의 다른 한쪽에는 마오쩌둥이 자리잡고 있다. 장제스와 국민당이 중국의 상부구조를 세웠다면 마오쩌둥은 기존의 하부구조를 해체하여 다시 꾸몄다는 얘기다. 낙후된 농촌 문제를 개선하는 작업이 여기에 해당한다.
저자가 장제스가 노년에 느껴야 했던 좌절감을 마오쩌둥의 처지와 비교하고 있는 것도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이 두 사람이 모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두 사람의 차이는 뚜렷하다. "마오쩌둥이 시인이자 예술가였다면 장제스는 철학가이자 규율가였다. 한 사람은 방종한 삶을 살았고, 다른 한 사람은 초인적인 자기통제 능력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습이 결국에는 각자가 자기 고통에 대처하는 방법의 차이였을 뿐이며, 서로에게 맡겨졌던 역사적 과업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던 사실에 있어서는 비슷하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저자의 결론도 그런 맥락으로 이어진다. "미래에 이루어질 대만과 대륙의 통일은 경제협력과 문화교류를 통해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정치적 또는 군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서로를 '전범(戰犯)'과 '비적(匪賊)'으로 부르는 습관은 이미 사라졌다"라고. 앞서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제도적으로 연결돼야만 중국 혁명이 결산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은 변하고 있다. 과거 치열한 포격전으로 얼룩졌던 양안관계는 밀월관계로 돌아섰다. 화해와 교류의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대만의 건국 100년을 맞는 시점에서 나라의 기틀을 다졌던 장제스의 역할과 생각을 문득 되돌아보게 된다.
허영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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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제스 일기를 읽다'
레이 황 지음. 구범진 옮김
푸른역사. 2만 9500원
올해로 건국 100년을 맞는 대만의 역사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인물을 한 명 꼽자면 역시 장제스(蔣介石)일 것이다.
1911년 신해혁명이 성공함으로써 쑨원(孫文)을 중심으로 중화민국이 세워진 것이지만, 쑨원의 시대는 너무 일찍 저물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받은 주인공이 바로 장제스였다.
그는 국민당 정부의 주석 겸 육해공군의 총사령관으로 만주를 침범한 일본에 맞서 항일전쟁을 수행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도 국공내전을 이끈 주인공이었다.
결국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의 해방군 세력에 패해서 타이완 섬으로 쫓겨갔지만, 그 뒤에도 20년 이상을 대만의 최고 정치 지도자로서 군림했다.
물론 그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국가 안팎에서 밀려드는 위협으로부터 본토를 수호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앞장서서 투쟁했다는 측면에서 영웅이라는 찬사를 듣기도 하지만 끝내 대륙에서 밀려났다는 점에서는 국공내전의 패배자일 뿐이라는 평가도 없지 않다. 국공내전의 과정에서 드러난 국민당 지도부의 모습 자체가 지리멸렬했다.
그렇기에 그가 생전에 남긴 기록을 슬쩍 들쳐볼 필요가 있다. 진흙탕을 달리는 수레바퀴처럼 급박하게 돌아가던 역사의 현장에서 그가 무엇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부분적으로나마 그의 역사 인식을 이해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거 한 시절을 풍미했던 정치 지도자로서 그의 품격과 자질도 가려질 수 있을 터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장제스가 젊은 시절부터 집권 말기까지 줄곧 일기를 썼다는 점이다.
스물일곱 살이던 1915년부터 교통사고로 일기장을 대하지 못하게 된 1972년까지 썼다고 하니, 해수로 따져서도 무려 57년간이다.
아무리 바쁘더라도 매일 저녁 시간을 내서 붓으로 일기를 써내려갔다고 한다. 현재 미국 후버연구소에 보관중인 그의 일기장이 모두 55권에 이르고 있다.
'장제스 일기를 읽다'는 그의 일기를 바탕으로 격동의 중국 근현대사를 재구성했다. 중국계 미국인 역사학자로서 뉴욕의 뉴폴츠 대학교수를 지낸 레이 황(黃仁宇)이 그의 기록에 근거하여 장제스의 일대기를 추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일기에는 국민당이 중국공산당에게 패해 본토에서 쫓겨나게 된 과정과 국민당 정부가 대만 원주민들의 저항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던 1947년의 '2.28 사건' 등에 관한 내용도 두루 담겨 있다. 따라서 그의 개인적인 내면세계를 보여주는 외에도 당시 중국과 대만의 양안(兩岸) 관계에 있어 역사적 공백을 메워주는 데도 상당한 도움이 되고 있다는 평가다.
이를테면, 제2차대전 당시 일본 폭격을 위한 거점으로 청두(成都)에 B-29가 발진할 수 있는 비행장 건설비용 문제로 인해 장제스와 갈등이 빚어지자 미국측은 그 대안으로 공산당 지원방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또 장제스의 통역을 맡았던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이 자주 그와 부딪쳤으며, 어떤 때는 사적인 언쟁으로 통역이 중단되기도 했다는 일화도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이 일기는 장제스가 자신을 되돌아보고 스스로 채찍질하려는 목적으로 씌어졌기 때문에 실제로 '일어난 일'보다는 '일어나야 할 일'을 강조하고 있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전적으로 일기의 내용에 의존해 역사적 사실을 판단하기에는 한계가 없지 않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이 기록의 가치를 존중한다. "일기의 수백 군데의 기록은 비록 장제스 특유의 과장된 자기중심주의를 표출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하나의 임무에 헌신하는 한 인간을 그려내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저자는 장제스가 현대 중국의 발전과정에서 나름대로 중요한 전기를 마련했다고 분석한다.
중국의 미래를 위해 새로운 상부구조를 세웠다는 것이다. 근대국가로의 전환에 필요한 통일된 국가적 지휘체계와 행정기구, 법정 통화, 군사학교를 포함한 통합된 교육 시스템을 도입했던 사실들이 사례로 제시된다. 물론 중화민국이 아직 대륙을 지배하던 시절의 얘기다.
하지만 이런 시스템이 임시변통으로 만들어졌고 파괴된 구질서로부터 건져온 것이어서 비효율적이며 불안정했던 것도 숨길 수 없었던 사실이다. 그렇더라도 중국이 다른 나라들과 함께 세계 속에 자리잡도록 장제스가 기여한 부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중국 근대화의 장애 요인이던 군벌을 제거한 것도 장제스였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물론 이러한 평가의 다른 한쪽에는 마오쩌둥이 자리잡고 있다. 장제스와 국민당이 중국의 상부구조를 세웠다면 마오쩌둥은 기존의 하부구조를 해체하여 다시 꾸몄다는 얘기다. 낙후된 농촌 문제를 개선하는 작업이 여기에 해당한다.
저자가 장제스가 노년에 느껴야 했던 좌절감을 마오쩌둥의 처지와 비교하고 있는 것도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이 두 사람이 모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난 두 사람의 차이는 뚜렷하다. "마오쩌둥이 시인이자 예술가였다면 장제스는 철학가이자 규율가였다. 한 사람은 방종한 삶을 살았고, 다른 한 사람은 초인적인 자기통제 능력을 보였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모습이 결국에는 각자가 자기 고통에 대처하는 방법의 차이였을 뿐이며, 서로에게 맡겨졌던 역사적 과업으로 인해 고통을 겪었던 사실에 있어서는 비슷하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저자의 결론도 그런 맥락으로 이어진다. "미래에 이루어질 대만과 대륙의 통일은 경제협력과 문화교류를 통해 일어나야 할 것이다. 그것은 더 이상 정치적 또는 군사적인 문제가 아니다. 서로를 '전범(戰犯)'과 '비적(匪賊)'으로 부르는 습관은 이미 사라졌다"라고. 앞서의 상부구조와 하부구조가 제도적으로 연결돼야만 중국 혁명이 결산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세상은 변하고 있다. 과거 치열한 포격전으로 얼룩졌던 양안관계는 밀월관계로 돌아섰다. 화해와 교류의 변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대만의 건국 100년을 맞는 시점에서 나라의 기틀을 다졌던 장제스의 역할과 생각을 문득 되돌아보게 된다.
허영섭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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