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아침마다 열리는 ‘5분 자유발언’ 시간에 웬일인지 보라가 발언을 신청했었다. “국물도 없어”로 소문난 보라는 모두가 무서워하는 학급의 청소반장이다. 호기심 가득한 아이들의 시선을 받으며 보라는 엄마 얘기를 했다.
“영어 듣기 평가를 치른 날 엄마가 몇 개 맞았느냐고 묻기에 무심코 한 개만 틀리고 다 맞았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깜박 속은 엄마가 “야 우리 딸 최고다”라며 내가 제일 좋아하는 토스토를 아홉 개나 만들어 주셨어요.”그걸 먹으며 양심의 가책을 받았노라고, 그러면서 간신히 한마디를 던진다.
“엄마들은 단순해요. 그냥 속잖아요. …여러분 공부 열심히 합시다.”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보라는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울음을 삼켰다. 그 독한 보라가 말이다. 킥킥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멎는가 싶더니 하나 둘씩 눈시울이 붉어진다. 꼴찌를 면치 못하는 영신이는 고개를 숙였고, 일등을 독차지하는 은정이의 눈망울에도 이슬이 맺혔다. 잔물결이 일 듯이 교실에 아이들의 눈물이 번졌다. 교실은 고요하고 아이들의 얼굴은 아침 햇살을 받아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아이들이 흘린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거짓말일지언정 자신을 믿어주기를 바라는 엄마의 믿음에 대한 목마름일까? 자기들 때문에 늘 노심초사하는 엄마의 수고에 대한 양심의 가책일까? 아니면 공부 때문에 초라하게 느껴지는 자화상에 대한 자기 연민일까?
아무튼 우리 학급의 아이들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였다. 스터디 그룹의 참여율이 높아지고, 시험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임원들이 자기 희생을 하며 열심히 예상 문제를 뽑아오고, 공부와는 담을 싼 만년 꼴지 반 아이들이 웬지 난리를 쳐댔다. 깜짝 쇼 같은 아이들의 노력은 채 두 달을 채우지 못했지만 그 여운과 감동은 오래도록 교실을 맴돌았다.
보라의 눈물은 아이들 가슴속에 감동을 불러일으켰고, 그 감동은 차디찬 아이들의 정서를 자극했다. “공부”는 분명 지적 산물이지만 “공부하려는 마음”은 감성의 산물이다. 그저 머리로 하는 공부는 점수만을 올리지만 가슴으로 하는 공부는 인생을 변화시킨다. 교실에서의 공동체 의식은 공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보라의 눈물과 아이들의 감동이 일깨워 준 진리다. 아이들에게 한 수 배운 것이다.
아이들이 공부 때문에 괴로워할 때 그들의 지적 자존심을 건드리며 “공부하라”는 강요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 공부는 괴롭더라도 기쁨과 감동을 주는 작업이라는 인식을 갖게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인생의 목표가 공부를 통해 설정된다. 일등에게나 꼴찌에게나 공부가 스스로에게 유익한 것이고 꼭 해야 할 인생의 과정이라는 가르침을 줄 수 있다면 잘하고 못하고는 둘째 문제가 된다. 지금처럼 일등에게도 꼴찌에게도 “지겨움” 이상의 별 의미가 없는 공부체계는 우리 사회 전체의 적신호가 아닐 수 없다. 떨어지면 올릴 걱정, 오르면 더 올릴 걱정에 공부 고민은 끝이 없다. 재미없는 세상에서 아이들은 신경성 위장병을 앓으며, 컴퓨터 게임에 빠져든다.
이제 엄마들은 눈에 불을 켜야 한다. 재미없는 교과서를 만들고, 재미없는 교육과정을 만들고, 재미없는 입시를 만드는 허망한 정책에 차가운 분노를 가져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오늘 하루, “엄마들은 단순하다”고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가슴에 떠올려보자.
/ 김대유 (서울 서문여중 교사)
“영어 듣기 평가를 치른 날 엄마가 몇 개 맞았느냐고 묻기에 무심코 한 개만 틀리고 다 맞았다고 거짓말을 했는데 깜박 속은 엄마가 “야 우리 딸 최고다”라며 내가 제일 좋아하는 토스토를 아홉 개나 만들어 주셨어요.”그걸 먹으며 양심의 가책을 받았노라고, 그러면서 간신히 한마디를 던진다.
“엄마들은 단순해요. 그냥 속잖아요. …여러분 공부 열심히 합시다.”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보라는 눈물을 쏟았다. 그리고 울음을 삼켰다. 그 독한 보라가 말이다. 킥킥대던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멎는가 싶더니 하나 둘씩 눈시울이 붉어진다. 꼴찌를 면치 못하는 영신이는 고개를 숙였고, 일등을 독차지하는 은정이의 눈망울에도 이슬이 맺혔다. 잔물결이 일 듯이 교실에 아이들의 눈물이 번졌다. 교실은 고요하고 아이들의 얼굴은 아침 햇살을 받아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아이들이 흘린 눈물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거짓말일지언정 자신을 믿어주기를 바라는 엄마의 믿음에 대한 목마름일까? 자기들 때문에 늘 노심초사하는 엄마의 수고에 대한 양심의 가책일까? 아니면 공부 때문에 초라하게 느껴지는 자화상에 대한 자기 연민일까?
아무튼 우리 학급의 아이들이 변하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였다. 스터디 그룹의 참여율이 높아지고, 시험 공부에 열을 올리고, 임원들이 자기 희생을 하며 열심히 예상 문제를 뽑아오고, 공부와는 담을 싼 만년 꼴지 반 아이들이 웬지 난리를 쳐댔다. 깜짝 쇼 같은 아이들의 노력은 채 두 달을 채우지 못했지만 그 여운과 감동은 오래도록 교실을 맴돌았다.
보라의 눈물은 아이들 가슴속에 감동을 불러일으켰고, 그 감동은 차디찬 아이들의 정서를 자극했다. “공부”는 분명 지적 산물이지만 “공부하려는 마음”은 감성의 산물이다. 그저 머리로 하는 공부는 점수만을 올리지만 가슴으로 하는 공부는 인생을 변화시킨다. 교실에서의 공동체 의식은 공부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보라의 눈물과 아이들의 감동이 일깨워 준 진리다. 아이들에게 한 수 배운 것이다.
아이들이 공부 때문에 괴로워할 때 그들의 지적 자존심을 건드리며 “공부하라”는 강요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 공부는 괴롭더라도 기쁨과 감동을 주는 작업이라는 인식을 갖게 될 때 비로소 진정한 인생의 목표가 공부를 통해 설정된다. 일등에게나 꼴찌에게나 공부가 스스로에게 유익한 것이고 꼭 해야 할 인생의 과정이라는 가르침을 줄 수 있다면 잘하고 못하고는 둘째 문제가 된다. 지금처럼 일등에게도 꼴찌에게도 “지겨움” 이상의 별 의미가 없는 공부체계는 우리 사회 전체의 적신호가 아닐 수 없다. 떨어지면 올릴 걱정, 오르면 더 올릴 걱정에 공부 고민은 끝이 없다. 재미없는 세상에서 아이들은 신경성 위장병을 앓으며, 컴퓨터 게임에 빠져든다.
이제 엄마들은 눈에 불을 켜야 한다. 재미없는 교과서를 만들고, 재미없는 교육과정을 만들고, 재미없는 입시를 만드는 허망한 정책에 차가운 분노를 가져야 할 때가 온 것이다. 오늘 하루, “엄마들은 단순하다”고 그러면서 눈물을 흘리는 아이들의 모습을 가슴에 떠올려보자.
/ 김대유 (서울 서문여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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