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레’는 제주말로 ‘골목길’을 뜻한다. 마을을 허물고 아파트가 들어선 자리에 골목은 사라지고 현관만 남았다. 친구를 만나러 뛰어 나가던 골목은 아파트 비밀번호에 갇혔다. 그러나 어머니 곁을 떠나기 싫어하는 아이처럼, 사람들은 제 스스로 떠나온 자연의 품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속도를 포기하고 한 발짝씩, 덜 위생적으로 보이는 비포장 길을 걸으며, 효율적인 직선 도로 대신 구불구불한 길을 선택하고 있다.
고양시에도 정기적으로 자연 속 길을 걷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고양시의 길을 이야기 하는데 ‘고양들메길’을 빼놓을 수 없다. 주7회 가량 걷기 모임을 진행하는 동호회로, 고양시 인근의 걷기 좋은 길을 발견해 잇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양들메길 최경순 대표는 “전국 어느 유명한 곳보다 고양시가 걷기 좋다”고 말한다. 최경순 씨를 만나 고양시의 길과 그 길을 만든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이향지 리포터 greengreens@naver.com
고양시 길을 찾는 ‘고양들메길’ 사람들
“고양시 고봉산 높이가 208미터예요. 다른 동네 가면 산 취급도 못 받아요. 구릉이 있는 지역이라 아기자기한 산들이 모여 있어요. 그래서 고양시의 산은 산이라기보다 숲이에요. 걷다 보면 평지 숲이라는 느낌이 들어요.”
고양시는 숲이 잘 보존돼 있고 그늘 속에서 걸을 수 있는 코스가 많다. 비포장도로가 많아 자연을 벗 삼아 걸을 수 있다. 동네에서 버스나 전철을 타고 찾아가기도 어렵지 않다.
“사람들이 가까이 있어서 귀한 걸 잘 모르고 홀대하는 경향이 있는데, 많이 다녀본 사람들일 수록 고양시가 좋다고 얘기합니다.”
회원 1,300여 명, 정기 걷기 참여인원 평균 2~30명의 모임이지만 고양들메길은 담이 낮다. 아니 길처럼 아예 담이 없다. 회원이 아니어도 누구나 들어가 고양시 인근의 걷기 좋은 길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정기 걷기, 수요답사, 아름동행, 화요걷기, 달빛걷기라는 이름으로 일상적인 ‘걷기’를 진행한다. 참가 자격은 없다. 누구나 함께할 수 있다. 때로 갑작스럽게 번개 걷기를 제안하기도 한다.
고양들메길이 개척한 걷기 코스만 해도 지금까지 모두 11개다. 처음 만들 때 이후로 길이 바뀌기도 해, 길 만들기 작업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최경순 씨는 2009년에 고양들메길 온라인 카페를 개설했다. 숲과 문화재가 많은 고양시의 장점을 보다 많은 이들과 공유하고 싶어서다.
비문을 즐겨 보던 시골 소년
시골에서 자고 자란 최경순 씨는 여느 시골 아이들처럼 뒷동산에서 뛰어 놀았다. 뒷동산을 놀이터 삼아 놀다 문득 무덤 가 비석에 쓰인 글씨의 뜻이 궁금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그의 중요한 취미 하나는 비문을 읽는 것이다. 어느 나라 사람이고 무엇을 하다 어떻게 죽었는지 나와 있는 비석이 그는 재미있기만 하다.
13년 전, 서울 생활을 접고 고양시에 이사 왔을 때 그를 기쁘게 한 것도 비석이었다. 고양시는 조선시대 양반가문과 왕족들의 무덤이 많은 동네다.
“커다란 무덤이 많은데 알고 보니 국사책에서 보던 인물들이었죠. 신나게 돌아다녔어요. 차를 몰고 가다가 큰 무덤이 있으면 단 5분이라도 시간을 내서 이름만이라도 확인을 했어요. 그리고 다음에 다시 찾아가고.”
사람들을 만날 일이 있을 때면 ‘여기 이렇게 유명한 사람들 무덤이 많다. 함께 답사를 다니자’는 말을 꺼냈다. 그러나 좋다고 대답한 사람들 가운데 실제로 답사에 나오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래서 방향을 바꾸었다. 길과 역사를 접목한 것이다.
문화와 걷기를 접목시키다
유적지만 볼 게 아니라 걸어 다니면서 이 지역을 걸어보기로 했다. 온 나라에 걷기 열풍이 불기 전의 일이다. 마침 2009년 고양파주여성민우회 올레팀이 고양시 길을 안내해 달라는 의뢰를 해 와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그 해 가을 온라인 카페를 만들고 사람들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숲이 있고 비포장인 길을 주로 걸었다. 고양시의 특징인 숲길을 살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문화 유적에 얽힌 이야기도 함께 들려주었다. 학자가 아닌 바에야 무덤 속 유물에는 큰 관심이 없다. 오히려 무덤 속에 묻힌 사람과 그 주변에 살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에 흥미를 보였다. 호응이 좋았다.
처음 만든 길은 시청에서 출발해 배다리 누리길과 마상공원을 지나 대궐약수에서 공영왕릉, 견달산을 통과하고 문봉동까지 가는 코스였다. 공영왕릉의 전설이 담긴 대궐약수를 첫 코스로 정한 것은 고려시대의 사람인 공영왕에 대해 들려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길을 만들 때는 사전 조사를 진행한다. 항공사진을 보고 근처의 문화 유적을 살핀다. 가능하다면 코스에 포함시킨다. 조사 과정에서 뜻하지 않게 중요한 인물의 흔적을 만나기도 한다.
“고양동 건너편 선유동에 가니 조선 왕조 오백년 동안 가장 젊은 나이에 영의정을 했던 이준이라는 분의 무덤이 있었어요. 신숙주나 한명회에게 밀려 무덤이 초라했죠. 그 옆에 가니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영이라는 이의 무덤도 있었어요. 생각지도 않고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을 만날 때 굉장히 기쁘죠.”
길은 길이 아니라 문화다
도시 개발 과정에서 길이 사라지는 안타까운 일도 일어난다. 가좌마을에는 눈이 내린 벌판을 걸을 수 있는 유일한 지역이었으나 지금은 십자로 큰 길이 나면서 길이 사라졌다.
민간에서 걷기 열풍이 거세지면서 지자체도 적극 참가하고 있다. 아쉬운 것은 사전 협의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최경순 씨는 “산길 대신 도로를 택하는 등, 때론 엉뚱한 길을 만들기도 해 안타깝다”고 말했다. 송강누리길의 경우 송강마을에서 월산대군 사당까지 가는데, 운치 있는 산길을 두고 굳이 옆으로 길을 만들어서 안내하고 있다. 최경순 씨는 시민들이 걸을 길을 만드는 일에 시민의 의견을 사전에 듣고 세심하게 반영했으면 하는 바람을 품고 있다.
그는 앞으로 고양시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낼 계획이다. 북한산성의 전체가 고양시 땅이라는 것을 모르는 고양시민이 아직 많다는 것도 그의 마음을 바쁘게 한다. 서오릉과 서삼릉에 얽힌 이야기도 정리해서 알리고 싶다.
최경순 씨는 “길은 길이 아니라 문화”라고 말한다. “길이란 사람이 다녔기 때문에 생긴 것이죠. 나무를 하러 다니기도 하고 물건을 옮기기도 하고 산책 삼아 다닌 길도 있을 거예요. 저는 새로 만든 게 아니라 기존에 있던 길을 연결하고 설계하는 거예요. 길을 만들면서 저는 지나온 역사와 사람들을 존중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고양시 길 전문가 최경순 씨가 추천하는 ‘가족과 함께 걷기 좋은 길’
1. 유적지가 있는 서오릉, 서삼릉, 파주삼릉, 행주산성 길
서삼릉은 종마목장과 연결해서 아이들과 함께 걷기에 좋다. 서오릉은 능역이 넓고 조선 왕조 가운데 카리스마 넘친다는 숙종과 부인들의 무덤이 있다. 길게 걸을 수 있으며 자연도 잘 보존돼 있다. 파주 삼릉은 숨겨진 보물이다. 공릉저수지와 연결해 걷기 좋으며 주차공간이나 안내가 잘 되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행주산성을 따라 걷기에 좋다. 달팽이처럼 산성 중간으로 걸을 수도 있다.
2. 동네 옆길 걷는 기분, 성라산 길
동네 가까운 길을 찾는다면 원당역 뒤 성라산 길이 좋다. 어울림누리에서 성라산으로 이어지는 길은 제법 길에 걸을 수 있다. 다양한 산책로가 있어 가족 단위로 걷기에 좋다.
4. 한적한 길, 대자동 길
사람들이 없는 한적한 길로 대자동에 있는 최영장군 묘로 해서 대자산을 올라갔다 내려오는 것도 좋다. 산이라고 하지만 높이는 130 미터밖에 안 돼 힘들지 않다. 주차하고 다녀오기에도 편리하다.
고양들메길이 만든 길 11개 코스와 자세한 지도는 다음카페(cafe.daum.net/gyolle)에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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