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하동 전통음식 이어가는 여영희 씨
요리는 한평생 나의 놀이
“음식을 전부 만들어서 마지막으로 지리산에서 한번 전시회를 내는 기 꿈이라. 꼭 그렇게 한번 해보고 싶어. 젊은이들 불러갖고 아무 부담 없이 멕이고 보여주고 앞으로 이렇게 좋은 음식 해 먹어라. 내가 살아보니까 이 음식이 좋더라는 걸 알려주고 싶어. 그 레시피를 책으로 내고.”
백발의 요리사 여영희 씨는 아직 하고 싶은 일이 많다고 했다. 꿈꾸는 일도 못다 한 일도 많은데 시간이 부족해서 걱정이라고. 그렇게 말하는 그의 입가에 살짝 웃음이 번졌다. 서울과 일산, 지리산 자락을 오가며 대화동 ‘미당한정식’과 문촌마을 5단지에 있는 반찬가게 ‘지리산에 오면’을 의욕적으로 꾸려가는 힘의 원천, 그것은 ‘어머니의 밥’이었다.
이향지 리포터 greengreens@naver.com
여영희 씨는 음식 맛 좋기로 이름난 하동에서 자랐다. ‘미당한정식’과 ‘지리산에 오면’에서 차려내는 반가(班家)의 음식들은 모두 그가 어릴 적부터 먹고 자라난 것들이다. 지리산과 섬진강, 남해 바다가 가까이 있는 하동은 먹거리가 풍성했다. 철마다 산과 들, 바다가 준 재료에 간장 된장 고추장을 더해 음식을 만들던 어머니의 솜씨를 여영희 씨는 그대로 물려받았다.
“옛날 반가에 사는 집 마나님들은 일 년 내 먹거리를 만들잖아요. 장이 기본이었지. 된장 간장 고추장 김치…."
어머니는 하동 땅에서 솜씨 좋기로 유명했다. 여학교를 나온 ‘신여성’이었던 여영희 씨의 어머니는, 그러나 어릴 때부터 할머니의 손에서 자랐다.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셨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영희 씨의 손맛은 어머니의 할머니, 그러니까 외증조할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다.
“장아찌 떡 한과 다 하셨어. 깻잎 콩잎 장아찌에 통대구 아가미 젓갈….”
일 년 내 음식 만드는 게 일이었다. 철따라 나오는 재료들은 한 해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장이 독에 넘치도록 있어도 그해 나온 콩으로 메주를 쓰고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옛날 어머니들 사는 방식이었다.
“요새는 굴비가 나오지만 예전엔 참조기를 사서 소금에 간해놨다가 그늘에 그대로 달아놓으면 저 혼자 말라서 간솔처럼 마르거든. 그러면 찢어서 고추장에 박아놨다가 여름 반찬 했지.”
지리산 자락 안동의 맛
여영희 씨는 18살에 음식을 배우기 시작했다. 1981년 그의 어머니가 환갑을 넘겼을 때 안동 땅에 식당을 열었다. 안동 땅의 유명한 집안, 게다가 솜씨 좋은 어머니와 그 딸이 문을 열자 손님들은 이내 그곳으로 몰렸다. 수정식당, 섬호식당, 강변가든으로 이름을 바꾸고 자리를 옮기면서 식당을 해 큰돈을 벌었다.
호텔사업을 시작해 많은 돈을 ‘날렸다’고 했다. 300평 식당을 닫고 지인의 추천으로 일산에 온 것이 10년 전이다. 장항동에서 ‘이천밥상’을 열어 돌솥밥에 전통밥상을 선보이다 문을 닫았다. 단골들의 성화로 대화동에 식당을, 문촌마을에 반찬가게를 열었다.
매실 밭은 하동에 있고, 지리산 함양에서 친척들 동네 사람들과 함께 식재료를 만드는 집이 있다. 그곳에서 매실 간장 된장 장아찌 젓갈 고추장 등 식당과 반찬가게에서 쓰는 모든 음식을 만든다. 시장에서 돈 주고 사면 더 싼 상추를 땡볕에 쪼그리고 앉아 손으로 길러 뽑아다 일산까지 들고 온다. 일가친척 다 나눠먹고 손님들한테 팔 것까지 지으려니 한 번 기르는 양도 보통을 넘는다. 메주도 한 해 만드는 것이 2천 킬로그램, 김장거리 배추도 유기농으로 지어 지난해 가을 2천포기를 담았다. 4,500평 밭에서 기른 채소들로 요리를 한다.
“손님들 건강생각해라. 어머니가 남겨주신 건 그거지. 그 생각 안할라면 음식 장사 하면 안 된다. 시대가 너무 음식을 갖고 사기를 치니까. 그러면 안 되는데.”
말끝이 흐려졌다. 안타까운 마음 때문이다. 그러지들 말라고 큰 소리 내기보다 그저 음식을 한다. 먹어보면 알겠지 하는 마음에서다. 너무 비싸면 먹으러 오지도 않을 것 같아 자연밥상 일인분에 9천원으로 값을 매겼다. 농사짓고 거두고 요리한 수고에 미치지 못하는 가격이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한 눈에 알아보고 이내 단골이 되는 손님들이 있어 힘을 낸다.
우리 음식 깊은 맛 알려주고 싶어
‘미당한정식’과 ‘지리산에 오면’에서 만나는 음식은 말간 민낯을 하고 있다. 소쿠리에 담은 찰보리밥, 3년 묵었다가 씻어 낸 김치, 뒷밭에서 막 뽑아 데친 듯한 나물들까지 꾸민 흔적이 없다. 숟가락을 들어 된장국을 한 입 먹어보면, 그제야 안다.
“요즘 음식은 상차림은 화려한데 깊은 맛이 없어. 너무 가벼워 엉터리라. 시대에 맞춰 기술은 진화하는데 맛은 빠져.”
여영희 씨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음식을 배우고 싶다 했다. 요리학원이나 연구소에는 더 이상 배울 게 없어, 진짜 맛을 아는 고장을 다니며 요리를 배우고 싶다.
“좋은 거에 마음이 가면 절대로 궂은 건 못해. 음식 하나에만 진실을 담고 싶은 그런 마음이지.”
지리산 자락에서 식재료 준비하고, 서울에서 조카들이 하는 식당이며 연구소 다녀오고, 반찬가게에 식당까지 정신없이 바쁜 나날이다. 1945년 생으로 열여덟에 요리를 시작해 평생 해오던 일이라 철만 되면 어떤 나물을 준비하고 무슨 장을 담글지 딱딱 꼽힌다. 인터뷰하던 날 아침까지도 그는 지리산 자락에 있었다. 맛이 가장 좋은 철에 매실을 담그려니 바쁠 수밖에.
“안 미치면 못해. 영혼에 거기 딱 붙어서 딴 생각할 여지가 없어. 젊을 때는 하기 싫을 때가 많았지. 지금 내 나이에 남들은 노는데, 일하는 게 재밌고 감사하고 고맙지. 오락거리 하나 없어도 요리 하나만으로 충분해.”
문의 미당한정식(031-922-0907) 지리산에 오면(031-922-8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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