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도 한번 해볼까? 그들 ‘배우’가 되다!!
고양시 동네극단 ‘잡(雜)’
지난 금요일 저녁, 바깥 날씨는 비바람이 불고 쌀쌀했지만 행신동 ‘재미있는 느티나무 온가족도서관-동굴’에는 열기가 가득했다. 11월 17일 오후 7시 호수아트홀에서 열리는 첫 번째 무대를 앞두고 마지막 리허설에 여념이 없는 그들은 동네극단 ‘잡’의 단원들.
식구들의 저녁 밥상을 챙겨주기 바쁘게 모여든 그들은 그 순간만큼은 아내와 엄마라는 이름을 내려놓고 연극 ‘아름다운 사인’의 배우로 돌아간다. 번듯한 무대장치도 조명도 없는 조그만 공간이지만 내일 있을 무대에 대한 두려움과 설레임으로 마지막 연습에 몰두하는 모습이 사뭇 진지하다.
“여섯 구의 시체가 들어왔습니다. 거의 같은 시간대였죠. 여섯 구의 시체, 여자 여섯, 여섯 모두 자살, 참 재미있는 우연이었죠.” 시체 검시관 유화이의 독백으로 시작되는 연극은 블랙 코미디의 대가, 장진 감독의 ‘아름다운 사인(死因)’이다.
그런데 첫 정기공연의 작품치고는 좀 묵직하다. ‘잡’의 연기지도를 맡고 있고, 또 검시관 유화이 역으로 함께 무대에 오르는 맘마 최지숙 씨는 “첫 번째라 아직은 연기실력도 부족하고 그래서 좀 가볍고 재미있는 작품으로 하려고 했다. 회원들 끼리 이런 저런 작품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잡’의 회원들 대부분이 여성이다 보니 1999년 초연 이래 많은 여성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킨 ‘아름다운 사인’을 한 번 해보자고 결정했다”고 한다.
‘아름다운 사인’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여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화제작. 자살이라는 쉽지 않은 주제와 1시간이 넘는 작품분량이 연극 초보인 이들에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단원들은 “무대장치부터 의상, 소품, 음악 등 우리 모두가 해내야 하고 여러 가지로 처음 무대에 올리는 작품으로는 버거운 것이 사실”이라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좀 서툴면 어떤가. 아줌마 특유의 에너지로 무대를 채울 그들의 열정만큼은 그 어떤 극단에 못지않은 것을.
-섞이고 모이기 좋아하는 그들이 ‘잡’으로 뭉쳤다
동네극단 ‘잡’이 이루어지게 된 계기는 2010년 연극판에서 인연을 맺었던 맘마(최지숙)와 장군(최승집)이 고양시에서 다시 만나게 되면서부터다. 2012년 2월 의기투합한 이들은 ‘동네극단 공고문을 내고 단원들을 모집했다. 이렇게 공고문을 보고 모여든 이들이 지금의 단원들, 행신 화정 일산에 사는 주부들이었다. 그렇게 ’잡‘은 의욕을 갖고 시작했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나간 이들도 있고 또 새로 들어오기도 하면서 1기 멤버가 결성됐다. 최숙자 길정선 정경화 김은미 이수경 최수남 최지숙 최승집 윤태경 씨 등 9명의 1기 단원들은 올 4월 첫 작품으로 ’아름다운 사인‘을 정하고, 5월 극단 이름을 ’잡‘이라 정했다.
‘섞이다, 모이다’라는 의미를 지닌 ‘잡(雜)’이란 이름대로 단원들은 동네 일, 사람 사는 일에 늘 관심을 갖고 모이고 섞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다. 정경화 씨는 “사람들과 섞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모였지만 연극판에서 10년 넘게 활동한 최지숙 씨와 최승집, 윤태경 씨 등 남성 단원 외 단원들은 모두 30~40대 주부들로 연기 초보자들”이라고 한다. 그러다 보니 올 4월 첫 작품을 정하고, 7월에 성미산동네연극축제를 함께 보면서 각오도 다졌지만 8월 아이들이 방학하면서 함께 ‘잡’도 방학에 들어가게 됐다고. 최지숙 씨는 “본격적인 연습은 10월부터, 그때 공연날짜도 정하고 부랴부랴 맹연습을 했다”고 털어놓는다. 일주일에 한번 씩 바쁜 주부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또 하나의 출산과도 같은 ‘아름다운 사인’을 무대에 올리기 까지, 단원들은 자신과 또 다른 인물로 살았다.
막걸리 사발로 농약을 마신 45세 조숙자, 27층 건물에서 뛰어내린 35세 한혜진, 한강에서 자동차 추락사로 죽은 27세 최정미, 수면제를 먹고 질식사로 죽은 31세 이수민, 나일론 끈으로 목메어 죽은 53세 김귀인, 동맥을 끊고 자살한 16세 정선아 라는 인물로.
‘아름다운 사인’은 이들 6명의 곁에 있던 남자들은 이 여자들의 삶과 죽음에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들의 죽음은 자살이지만 결국은 타살이나 다름없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무거운 주제지만 연극은 내내 무겁지만은 않다. 각각의 사연을 담은 유서를 읽는 동안 많은 이들이 눈물을 훔치지만, 시체실로 들어온 여인들의 유쾌하고 발칙한 ‘생애 최고의 수다잔치’가 큰 웃음을 선사하기도 한다.
관객의 감동도 감동이지만, 지난 9개월 또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타인의 삶을 살았던 단원들의 감회도 남다를 터. 극중 인물에 몰입해 그들의 삶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했던 단원들은 “무대 위에서 나 아닌 다른 사람의 삶을 연기하는 동안 결국 나 자신의 문제를 되돌아보게 되는 것이 연극의 매력인 것 같다”고 말한다.
“혼자 하는 일도 의미가 다 있지만 연극은 대본부터 연출, 연기, 무대장치 등 여러 사람이 뭉쳐야 하는 작업이란 것이 마음을 끌었다. 무엇이든 힘을 같이 뭉치면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더 의미도 있지 않겠느냐”는 동네극단 ‘잡’. 앞으로는 직접 대본도 쓰고 연출하는 창작극을 공연하고 싶다는 ‘잡’은 매년 한번 씩 정기공연도 꾸준히 할 계획이다. 또 현재 ‘잡’과 함께 공감을 나눌 2기생도 모집하고 있다. 모집문의는 장군 031-972-3567/맘마 031-974-9831
이난숙 리포터 success6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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