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때는 어른이 되고 싶고 나이드니 어려지고 싶었습니다. 허나 세월은 나만 기다려주지는 않더군요. 어느덧 눈가에 주름도 늘어나고, 한 해를 보내는 마음도 전과 같지 않네요.
그래도 한 해를 마무리하며 고마워 할 누군가가 있다면 마음이 아주 시리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우리네 이웃들은 어떤 마음으로 2014년을 살았고, 떠나보내는지 궁금했습니다. 고마운 이들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인터뷰하고 리포터가 대화체로 다시 썼습니다. 찬찬히 읽고 난 다음에는 여러분도 누군가에게 감사 편지를 쓰게 되기를 바라면서.
이향지 리포터 greengreens@naver.com
장항동 카페 스투간 KAFFE STUGAN 오유경(48)씨
고마운 나의 커피 오두막
2007년까지 일러스트레이터로 왕성하게 일했어요. 밤 11시가 돼서 아이들이 잠들면 그때부터 작업을 하는 나날이었죠. 출판 미술의 특성상 마감이 임박하면 한 달에 보름은 밤을 샜어요. 슈퍼우먼에 대한 환상도 있었고 무엇보다 체력에 자신이 있었으니까요. 우쭐하던 건 한 순간 무너졌어요. 건강에 적신호가 온 거예요. 모든 일을 끊고 쉬었더니 일 년 후엔 거래처가 다 사라졌어요.
그 후로 판화 작업도 하고 미술심리치료를 배워 발달장애 학생들과 만나기 시작했어요. 그게 2010년까지였어요.
그 즈음 고민이 많았어요. 남편 사업이 잘 안됐거든요. 아직 아이들도 더 커야 하는데 우리 미래는 어떻게 할지 걱정도 많았어요. 뭔가 계기가 필요했는데 그때 떠오른 게 커피였어요. 우리 부부가 같이 할 수 있으면서도 70살 까지는 돈을 벌 수 있는 일. 둘 다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일, 커피라면 괜찮겠다 생각했어요.
저지르듯 시작한 카페
마음을 먹고 나선 2년 동안 본격적으로 배웠죠. 하지만 정작 일을 시작하려면 첫 발을 떼는 게 참 어려운 사람이거든요. 어느 날 우연히 라페스타를 지나가는데 카페를 하면 딱 좋을 것 같은 자리가 보이는 거예요. 시세나 물어보자고 들어간 게 계약을 하게 됐어요. 그래도 저지르길 잘한 거 같아요. 남편이 당황하긴 했지만, 우리 나이에 더 크고 좋은 일보다는 우리 색깔을 보여주는 집으로 작고 알차게 하면 좋지 않냐고 설득했어요.
계약을 하고 한 달 간은 남의 가게에 가서 돈을 드리고 아침 8시부터 밤 12시까지 커피를 배웠어요. 너무 괴로웠죠.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했나 몰라요.
2011년 카페를 열고 처음에는 쉽지 않았어요. 작가님 선생님 소리만 듣던 제가 아줌마 이모님으로 불릴 때 깜짝깜짝 놀랐어요. 20년 해오던 일을 접어도 될 만큼 내가 잘 살고 있는지 회의감도 들고요. 호의를 이용하는 사람을 만날 때면 더 힘들었어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강해 졌나 봐요. 그림 그릴 때는 누가 내 작품 가지고 뭐라고 하면 힘들었는데 지금은 누가 뭐라고 해도 금방 나아져요. 백 개 중 쉰다섯 개 가지려고 애쓰지 말고 마흔 아홉 개만 가지자 마음먹으니 편안해졌어요.
마음 알아주는 손님과 이 공간에 고마워
제가 집에서 아줌마들 불러 파티 하는 걸 좋아하던 스타일이거든요. 바빠도 집에서 테이블 예쁘게 세팅해 기분 좋게 먹었죠. 그때 하던 메뉴들이 그대로 저희 카페에 있어요. 와플이며 샌드위치, 쿠키 모두 제 방식대로 만들어요.
카페 스투간이라는 말은 커피 오두막이라는 뜻이에요. 음악과 미술, 책을 좋아하는 우리 부부가 핸드드립 커피를 만드는 따뜻한 오두막이에요. 저는 커피를 주문하시면 테이블에 가져다 드려요. 제 오두막에 손님들이 초대받은 기분이 들잖아요. 아침에 가게 문을 열면 꽃들에게 먼저 인사해요. “안녕? 오늘도 잘 해보자! 너는 꽃 피웠구나? 정말 잘했다.”
전에는 밖에서 에너지를 구했다면 이제는 온전히 이 안에서 에너지가 돌아요. 시작은 힘들었지만 가게를 하면서 성장했어요. 2014년은 낯설음과 혼란을 지나 안착한 한해였어요. 갈수록 손님들도 알아주시니 즐겁고 행복해요. 누군가에게 공감 받고 있는 것처럼 좋은 게 없잖아요. 장사하면서도 손님들하고 공감할 수 있구나, 손님들과 이 공간에 고마워요.
음악 강사 중산동 양유정(40)씨
소중한 동네 이웃들에게 감사해요
어릴 때부터 음악을 했어요. 피아노는 30년 정도 쳤고 전공은 성악을 했어요. 주로 교회에서 음악 활동을 해왔죠.
4년 전에 결혼하고 중산동 하늘마을로 이사 온 지 2년이 됐어요. 처음은 누구나 열정에 불타잖아요. 저도 대안학교, 초등학교, 또 집에서도 홈스쿨 음악 수업을 하면서 정말 열심히 살았어요. 적응이 돼서 그런 걸까요? 올해 오히려 더 힘들더라고요.
2014년은 누구나 힘들었을 거 같아요. 세월호 사건도 있었고 나라 전체가 어려웠잖아요. 저도 건강이 많이 안 좋아 과로로 쓰러져 입원하기까지 했어요.
그 와중에 참 고마운 사람이 있어요. 첫 해부터 지금까지 쭉 저를 믿어 주시는 동네 이웃분이에요.
이사 오자마자 가까운 초등학교에서 제 수업을 알리는 명함을 나눠줬는데 그때 시작된 인연이죠. 저를 믿고 아이들을 보내셨고 학교에도 소개해서 오카리나 수업도 했어요. 지금까지도 꾸준히 관계를 맺고 있어요. 나이가 같아 친구처럼 편하고 언제나 고마워요.
따뜻한 사람 되고 싶어
요즘 아이들은 참 어려운 게 많아요. 부모들의 기대도 높고 다방면에서 잘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심해요.
저는 아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지만 그러면서도 진정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한 사람 한 사람 들여다보면서 가고 싶어요. 또 음악을 즐기면서 살아갈 수 있게 도와주고 싶어요.
올해는 참 희로애락이 많았던 한해였어요. 나라도 많이 힘들고 아이들도 지쳐있어요. 우리 사회가 냉소적으로 변해도 나는 따뜻한 사람이 되기를 원해요. 사람 관계가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내년에는 한 템포 쉬면서 편하게 가고 싶어요. 아이도 생겼으면 좋겠고 신랑 하는 일도 더 잘 되면 좋겠어요. 신랑이 스트레스 받으면 나도 힘들거든요. 그동안 남편한테 사랑을 많이 받았으니까 내년에는 제가 잘 해주고 싶어요. 맛난 요리도 만들어서 응원하면 남편도 힘나겠죠.
나윤이 엄마아빠 탄현동 김정훈(32)?양소라(33)씨 부부
부모님 마음 이제 조금 알 것 같아요
나윤이 아빠 정훈씨 이야기
양가 부모님 모두 제주도에 계세요. 급할 때 아이 맡길 곳 하나 없는 일산에서 맞벌이로 살면서 어려운 순간이 참 많았어요.
학교 끝나고 오면 어린이집에 가서 나윤이 데리고 와서 엄마가 퇴근하면 같이 저녁밥 먹고 아이랑 놀아주고 재우고 이게 매일 반복이에요. 나윤이가 가만히 있는 걸 안 좋아 하거든요. 주말에는 어디든 나가서 놀아야죠.
올해는 더 정신없이 바빴어요. 좋아하는 운동도 전혀 못하고. 30대 초에 일하느라 바쁘다 생각했는데 그건 아무 것도 아니더라고요.
힘들 때마다 육아를 함께 해주신 분들은 양가 부모님이었어요. 특히 장모님은 이제 환갑이신데 나윤이가 아파서 어린이집에 맡기지 못할 때마다 멀리 제주도에서 올라와 주셨어요. 김치 육개장 전복 같은 음식도 해다 주시고 몸에 좋은 재료도 많이 챙겨주세요.
예전엔 일하는 게 바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무것도 아니었어요. 부모가 돼 보니 부모님 마음을 알 것 같아요. 일 하는 건 기본이고 자신이 하고픈 것 다 포기하며 우리를 키우신 거잖아요. 우리 부모님도 그러셨구나. 부모란 이런 거구나 알게 됐어요. 일과 육아 모두 해내는 아내에게도 고맙고 사랑해요.
나윤이 엄마 소라씨 이야기
뱃속에 있을 때가 가장 편하다는 말이 정말이었어요. 육아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의 연속이었어요. 나윤이는 22개월인데 올해 그야말로 폭풍성장을 했어요. 18개월에 한두 단어를 말하기 시작하더니 20개월에 “엄마 까까 주세요 배고파” 이런 말도 하고요. 어린이집에서도 잘 지내주니 고맙죠.
그런데 이번엔 나윤이 답지 않게 크게 아팠어요. 아무리 아파도 음식은 잘 먹던 아이였는데 이번엔 아무것도 안 먹으려고 하고 폐렴 직전까지 가서 며칠 고생했어요. 다행히 회복이 되고 잘 자라고 있어서 고맙죠.
엄마가 되고 나서 제가 많이 달라졌어요. 삶의 가장 큰 전환점이었어요. 세상을 보는 눈이 관대하게 바뀐 것 같아요. 전에는 손해를 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손해를 봐도 나쁘지 않다는 마음이 들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게 됐어요. 엄마란 이런 거라는 느낌, 올해 더 알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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